1월 초, 수많은 클럽들이 열린다. 새해 독서모임부터 재테크 모임까지. 어느 순간부터 모임 주제의 중심에는 다이어트가 있다. 체형과 체중관리는 현대인의 필수 자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더 이상 체중이 풍요의 대상이 아니다. 날씬할수록 미덕이 된 사회적 기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는 몸에 대한 관리가 때로는 미련함이나 자기관리하지 못함으로 확장되는 이 조화 속에 쉽게 고개를 가로젓기도 어렵다.
영화 [클럽제로]는 먹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면서,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유럽의 한 사립 고등학교 특별활동반에서는 학부모의 요청에 따라 [클럽제로]가 열린다. 이 클럽에서는 "의식적인 먹기"를 통해서 먹기보다 생각하기를 강조한다. 이 생각하기가 요즘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형태의 올바름으로 제시된다. 먼저 기후위기에서 불필요한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식품회사의 마케팅에 속지말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먹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 관리부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세계 절반이 굶주리는 데 풍요롭게 먹기는 불평등하다는 쪽까지 제시된다.
대부분 그 논리에 관객이나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데, 어색한 음악이 귀를 간지럽힌다. 무엇인가 불협화음이 나는 듯한 혹은 20세기 초에 근대적 교향곡의 화성을 모두 철폐하고자 했던 기괴한 음악이 흘렀던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과연, 그 주장은 항상 옳은 것일까? 옳다는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를 묻는다. 아이들은 점점 덜 먹게 된다. 점점 더 먹게 되는 것은 노폐물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혐오와 폭력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혐오는 그 대상이 무조건 틀리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옳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옳다는 방식을 강력히 유지하기 위해서 틀린 것을 규정한다. 적게 먹는 것이 '의식적'이라고 가정한다.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 먹는 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모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의식적으로 먹는 것이 왜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물어보게 된다. 그 의문을 불규칙한 음악에서, 가족끼리의 식사자리에서 보여준다. 그 표현이 공격적인 것과는 다르다.
동시에 폭력은 다시금 무엇인지 물어보게 된다. 클럽 제로의 멤버들은 사립학교의 고등학생들로서 훈육의 대상이면서 자율성을 갖춘 존재로 대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개인의 탄생 이후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위치했다.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를 쓰는 아시아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중요시하는 유럽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몸을 마주칠 자유를 강조했던 한 철학자는 마스크를 통해 자유와 사랑의 상실을 주장했지만, 그 증폭이 수많은 상실을 가져왔다. 그간 사회에서 강조했던 자유의 기작은 언제나 최우선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떠한 선택에서도 훈육이나 올바름의 윤리는 작동할 수 있는지 물어보게 된다. 아이의 생존을 위해서 먹기를 강조하는 부모와 아이의 '의식적인 먹기'를 존중하며 아이가 점점 말라가는 모습을 내버려 두는 부모 중에서 어떤 것이 폭력적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여타의 분석을 제외하고도 매끈한 색채감과 파격적인 스토리 전개는 인상적이었다. 과연 무엇이 무엇인가라고 고민해 볼 수 있는 추천할만한 영화이다. 개봉 24년 1월 24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