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일상
세계가 이루어졌다면, 선이나 끈은 아니었을까.
연주회를 들으며 이 문장이 생각났다. 5명의 연주자는 오랫동안 이어진 대학교 클래식 기타 모임의 멤버들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 시절 기타에 대한 동경이 있었듯, 그들은 모두 전공자들이 아니다. 복잡한 철학이나 공학을 전공으로 하며 여전히 그 지식과 경험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한국사회의 빡빡한 기업과 상아탑에서 일하면서 6현의 기타와 연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만찮은 삶에서 자기를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을 것이고, 자기를 무한히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잣은 그물망이었을 것 같다.
그들이 학교를 떠나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서너 살 때도 모임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매년, 격년 연주회를 진행하다가, 코로나가 지나치고 삶은 더욱 야박하여 5년 만에 다시금 공연을 준비했단다. 중간중간 작은 콘서트처럼 한 멤버는 마이크를 잡고 환갑 되기 전에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너스레를 긴장된 목소리로 전했다. 소소한 웃음과 그들의 수줍은 진행과 달리 10여 곡을 독주에서 5중주까지 세밀하게 배치하면서 두 시간이 예술의 전당 공연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물론 연주자 한 명과 각별한 ‘끈’은 나에게 특정 노래에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예술은 재현 속에서 마음의 어딘가를 끌어당긴다. 그와 회사에서 만나서 지금까지 인연을 가깝게 이어올 수 있는 것은 나의 아픔과 그의 고됨을 나눌 수 있었던 시기에 달려있었다. 나의 퇴사에 앞서서, 그의 번아웃을 목도했을 때 산에 오르기도 했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젤리를 나누어 먹기도 했던 기억이 피어올랐다. 물론 진짜 괴로움은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으나, 그때 근사의 누구라도 있다면 삶은 그렇게 홀로 울 차가움만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전문 예술인들이 자기들만의 구역에서 타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나라 문화예술 세계의 모습과 달랐다. 예술로 밥 먹고 사는 이들, 혹은 밥 굶는 이들의 오프닝 세션에 초대되었을 때, 예술가와 관객 모두 그 업계 사람들이기 때문에 업계 충족적 상부상조가 일어난다. 어딜 가도 그들이 그들을 소비하고 비평한다. 과연 그 넓이는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까? 바로 삶의 궤적에서 만났던 이들의 마음을 통해 예술을 문을 두드릴 수가 있다.
격정적이지도 않고, 아주 평온한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곳에서 생각난 연주자와 나의 교감은 보편성의 문이 되는 특수성의 감상이었다. 그러한 맥들이 뚫린다면 어떤 이의 선율과 선에서 마구 부수어버린 작품 나름의 외로운 날카로움에서 삶은 밀어 올려지고 버틸 구석을 찾게 된다. 그의 초대에 감사하며, 공지부터 악보, 장소까지 모든 것을 자신들이 준비했던 뿌듯한 시간을 나눌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특히 포스터는 그의 딸이 그린 작품이었는데, 소개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기타 모임 [미련]의 모든 것을 지켜봐 온 이미지였다. 샤갈과 야수파가 떠오르는 이 이미지의 감상평을 간단히 올리며, 등장한 푸른 호랑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중에 나를, 혹을 떠올려본다. 수많은 이미지는 선으로 이뤄지고, 이미지는 쌓여 삶이 되고 돌이켜보면 무엇인가를 지탱할 끈이 된다. 한 줄만 더 써보면, 예술이 사회를 구성할 운율이 된다.
조유란 <없는 것이 본다> 캔버스에 유채 90.0 X 72.7 cm, 2025
밤의 어둠을 머금은 듯한 파란 호랑이가 눈을 뜬다.
그러나 그 눈은 짐승의 것이 아니다. 화면 위에 겹쳐진 거대한 눈동자는 마치 나를 향해 열려 있는 또 하나의 세계 같다.
보는 순간, 시선은 역류한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호랑이는 현실에 없는 색을 두르고 있지만, 그 낯선 빛깔이 오히려 더 현실처럼 다가온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꿈과 환상 속의 장식이 아니라, 내 안의 어둠을 꿰뚫는 검은 창이다.
우리는 흔히 본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그림 앞에서는 믿음이 깨진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자리가 바뀌고,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흔들린다.
눈은 화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림 밖으로 번져 나와 내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혹은, 무엇에게 붙들려 있는가. - 마로이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