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⑩_ 말의 거리와 지성의 무게

COVID-19와 동시대


며칠 전 1호선 열차가 출근길에 멈춘 적이 있다. 지인이 사진을 보내왔고 사람들은 열차 타는 플랫폼에 가득했다. 아마 대부분이 마스크를 하고 있었겠다. 기침이 나면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여간 부끄럽지 않은 요즈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적 거리가 있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속에서 서로 조심하자는 무언의 소리가 지나다닌다. 보이지 않은 언어의 거리이다.


마스크 너머 나의 침과 콧물이 닿지 않을 것도 있지만 인간이 마스크를 쓰는 행위는 때로는 말 없음의 시위이며 저항의 모습이기도 하다. 때론 마스크 너머 들려오는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상당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세상을 달리 한 고 노회찬 의원은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는 얼마나 말을 벼려왔을까, 그가 2003년 정도에 처음 언더그라운드에서 국회로 진출하고 방송에 나왔을 때 "같은 판에서 삼겹살을 구우면 판을 갈아야 합니다."라는 귀에 들어와 떠나지 않는 말에는 셀 수 없는 사유의 정수가 있다. 말 한마디는 그간의 노동운동가 단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책임 있는 자리의 한 마디의 무게가 상당히 강력하고 관계가 가까운 사이에서 하는 말일 수록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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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정치인의 세월호 막말은 그가 어떤 사유를 반복해왔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일이었다. 세월호, 집단의 기억은 가라앉을지언정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의 닻이 마음의 바닥을 계속 긁어대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히 나는 6년 전 세월호 참사 당일날부터 회사 휴직에 들어갔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구조가 완료되었다는 오보의 말을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후부터 묘한 감정과 기운이 일어났음을 느꼈고 인터넷 상으로 들어오는 뉴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말들로 이루어진 것들. 나는 며칠 뒤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 보았다. 약 6시간여 진도까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간 팽목항이다.


팽목항 그곳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잔잔한 바닷소리가 들릴만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적막함,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두려움은 찬란한 봄의 바닷가를 얼려버렸다. 나는 또 다른 표현의 도구인 카메라를 가져갔다가 이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선글라스를 벗게 되었다. 국가가 사라진 그곳에서 원시 공동체처럼 무료로 모든 것을 공급하는 개인과 사회의 조각을 발견하고, 나는 그것의 수혜를 받지 않은 채 묵묵히 그곳 근처 식당에서 밥을 꾸역꾸역 먹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국가가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최고 통치자는 마지막 의사결정을 '말'하기 위해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하던 참모와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구조하기가 그렇게 힘들답니까라는 말을 했던 정치인은 책임을 지게 되어있다. 비단 권력자뿐 아니라 가까운 사이에서 미래를 예단하거나 신뢰를 전복하는 말 한마디가 관계를 끊는데 가장 큰 단초가 되는 것도 유사하다.


인류학의 다양한 연구에서는 그 간 역사에서 정설이라 생각했던 것에 반례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한글 문자나 인간이 가진 특성이라 여겨지는 '언어'는 원래 백인 남성이 진행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사냥이나 위험물이 다가왔을 때 세밀하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에서 언어의 발달은 엄마가 아이를 양육할 때 발달했다고 밝혔다. 무엇이 기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간의 기반이 '사랑'에 있었는가 아니면 '두려움'에 있었는가에 대한 사유와 함께, 인간은 표현을 할 때 두려움은 보통 세밀하기보다는 급하고 간결하게 나타내고 사랑의 감정은 세밀하게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해본다.


또 다른 연구에서 사회는 발전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회나 자기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문자 역사, 소위 대표 역사에서 신석기 혁명이 인간이 정주가 시작되고, 농업이 발달해서 생산성이 급격히 늘어난 시기라도 쓰여있으나 그 시절 유골의 찾아보니 사람들이 강도 높은 노동을 해서 한쪽 팔이 휘어져 있거나 수렵, 채집을 했던 구석기보다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서 평균 수명이 짧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석기시대에는 지켜야 할 잉여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도 없어서 죽음이나 불행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 달랐다는 연구도 있다. 실제로 산업 혁명 이후에 생겨난 임금노동자의 경우, 초기 마르크스의 친구 엥겔스의 책[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이란 책에서 얼마나 초기 도시화 국면에서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떠밀려온 노동자들의 삶이 고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기존의 중세시대 보다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다. 수많은 생산성 혁명의 순간이 곧 발전이었는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갖게 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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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코로나 사태로 국가 체제가 어떻게 다르게 돌아갈 수 있는지 표면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동안 더 뛰어나 다 자타가 공인했던 국가에서 어떠한 형태의 동일한 난국을 대처해 나가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무턱대로 자유를 강조하며 우리 나리의 추적시스템을 비판했던 일부 서유럽 국가에서 사망률이 10%에 달하고 있다. 올림픽이나 국가 경제를 위해서 국민의 건강을 등한시한 곳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로 국가 방역 체계의 몰락과 경제의 멈춤을 경험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기사에서는 현재 유럽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나라와 권위주의적 통제국가 모두 결론적으로 '봉쇄'의 방책을 정하고 벌금 등의 개인 자유와 사유재산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들을 강화하고 있고 밝혔다. 우리나라, 대만, 싱가포르 등은 IT기술을 활용해서 스마트한 감시체계를 갖추었다고 구분했다. 결과론적 이야기이고 이번 바이러스의 특이성일 수도 있겠으나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간 주류, 선진국으로 불리던 이들은 뛰어난 사회보장제도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몇몇 정치인이나 대중 인식 속에서의 인종주의의 파편마저 나타내며 복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의 안전과 생명 보장의 역할이 멈춤의 일로에 있다. 이때 특히 발생하는 집단의 트라우마는 물론 환자 앞에 전문 의료진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우려된다. 말하자면 부족한 의료장비 속에서 이 산소호흡기를 누구에게 씌울 것인가를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살인자라는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시스템의 붕괴는 개인의 고난으로 나타난다. 92세 벨기에 노인이 '이제 나는 다 살았으니, 젊은이에게 호흡기를 넘겨달라'라고 얘기한 것은 위대한 희생정신이지만 시스템에 의한 죽음이다. 영국의 학교 휴교로 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식사를 전달하겠다는 기사는 영국 교육의 급식체계의 멈춤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의 예술과 종교 발달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것이 삶의 영원성을 기록하고자 하는 '문자'로 연결되었다. 형체가 없는 신과 공동체라는 무엇을 묶는 사라지지 않는 자국이 곧 '언어'이다. 엄마의 사랑으로 만들었던 세밀한 언어가 강력한 권력의 수단으로 바뀐다. 언어로 쌓인 강력한 문명과 시스템은 그렇게 한 인간의 생명 앞에서 허무러 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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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인간은 발달하는 인공지능에게 그 칼자루를 넘기길 원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살 확률과 무언가의 인간 가치를 매긴 뒤에 인공지능이 산소 호흡기를 쓰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한다. 인간은 그 일을 직접 하고 싶지 않다. 그 가치를 매기는 모델링 자체에 이미 인간의 인식은 쓰여있다. 얼굴인식 인공지능이 인종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던지, 남녀 구분이 있던지 하는 구분의 역사는 인간을 존재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 수단으로 보았던 주류 역사의 오점이기도 하다.


세월호 6주기, 갑작스러운 보수세력의 몰락, 코로나 사태의 대처, 글로벌 경기의 급격한 하락 등 혹자들이 말하는 이전과 다른 세계의 도래에 여전히 '말'은 '지성'을 구성한다. 사람들 사이의 '말'이 쌓여서 '여론'을 만들고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다만 내가 마스크 너머 시원한 숨을 기대하듯이 '지성'은 날카롭고 합리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사람의 무게를 중히 여기며 가치 판단하기 전에 존재 앞에 선 '말'의 무게를 알아가는 느린 발걸음이 아닌가 싶다. 이제 더 앞에 다가올 품격의 시대, 그것은 돈으로 가치화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인정하는 바탕 아래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갑자기 떠오른 말 우리가 돈이 없이 가오가 없지라는 말에 살짝 우리말의 품격을 더해서


"우리가 돈이 없지 맵시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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