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단식 2박 3일)
카페인 섭취가 하루의 시작인 나는
카페인 모닝을 스스로 자제하기엔 중독이고 습관이다.
솔직히 말하면 자제하고 싶지 않은 게 맞다.
강제로라도 카페인 모닝을 잠시 중단하고
몸과 영혼을 쉬게 하고 싶었다.
요즘 수도자들이 읽는 '준주성범'을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엄격한 책의 내용과 나의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크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이 많아서 좋다.
예를 들면 신은 매 순간 '자기를 버려라.'라고 하시는데,
나는 매 순간 '나를 찾아'서 살고 있었고 지금도 많은 순간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을 비워야지 하고
2박 3일 일정의 효소단식 피정을 신청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들어가는 날 아침도 역시 커피를 마시고, 과일도 챙겨 먹었다ㅎㅎㅎ
7년 전쯤, 3박 4일 효소단식피정에서 이틀 만에 탈출한 경험이 있어 두유와 누룽지를 조금, 몰래 챙겨갔다.
(다른 분들은 다들 효소만 드신 것 같았고, 피정 중에는 몰래 먹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ㅎㅎㅎㅎ)
피정장소는 산속에 있는 수녀원이었다.
작은 침대와 책상 하나가 있는 작은 수도원 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경이 아름다웠다.
첫날 점심식사시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시간을 보냈다.
효소를 물에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지만, 친교의 시간인지 식사시간은 매끼마다 한 시간이었다.
점심 식사 후,
쉬며 자신을 돌아보라고 주신 개인시간에
나는 몰래 누룽지 조금과 두유를 마셨다.
'밤에 너무 배고프면 잠이 안 오니까...' 라며 :)
오후 신부님 강의는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저녁식사 시간에도 효소를 탄 물 두 잔을 마시고,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다.
신부님의 말씀은 계속됐고, 알고 계시는 많은 지식들을
작은 내 머릿속에 한꺼번에 쏟아 넣는 느낌이어서 머릿속이 무겁게 느껴졌다.
고해성사를 드리고 미사까지 드린 첫째 날 밤은 꿀잠을 잤다.
둘째 날 아침부터 커피 생각이 났다.
커피를 안 마셔서 그런지 오전 내내 졸리고 머리가 띵한 느낌이었다.
먹지 않으면 에너지가 부족하니, 몸에서도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잠이 온다고 하셨다.
신부님은 AI시대에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청년선교가 힘들다며, 양자물리학과 동양사상 등등
많은 내용을 설명하시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가톨릭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설명하셨다.
그동안 당신 스스로 공부하시고 이루신 것들에 대한 설명도 장황했다.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같은 설명을 2박 3일 동안 두어 번 이상 하기도 하셨다.
신부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강의 때 한번, 매 끼니 식사시간, 그리고 미사시간이었지만
그 외 시간에도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었다.
사실 힘든 것 이상으로 오히려 일상생활에서도 느끼지 못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런 내게, 신부님은 산책 후 마주친 나를 붙잡고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으셨다.
듣다 못한 나는,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신부님?" 하며 무례하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비우러 이곳에 들어왔는데, 쏟아지는 정보와 이야기라는 거대한 바위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수녀원에서 키우시는 리트리버 번쩍이가 나를 잠시 행복하게 해 주었다.
번쩍이는 사람을 너무도 좋아하는 순하디 순한 멍멍이인데,
사람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자기를 만져달라고 크고 흙 묻는 제 발을 사람에게 턱 하니 얹어놓는다.
번쩍이 집 위에는 큰 버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바닥에 떨어진 버찌를 주위 먹는 것이 번쩍이의
취미였다. 내가 번쩍이와 놀고 있으니 한 수녀님께서 산책을 시키라고 하셔서 리드줄을 찾았더니
줄이 필요 없다고 혼자 멀리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수녀원 내부에서 산책하는 것이긴 하지만, 산책하다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에게 달려오는 번쩍이가 기특했다.
냄새를 맡다가도, 맛있는 버찌를 신나게 먹다가도 내가 부르면 바로 나에게 왔다.
나는 맛있는 걸 먹을 때 누가 부르면 귀찮아하기도 했는데, 번쩍이가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며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좋은 에너지 속에서 살고 있는 멍멍이라 그런가 보다.
어쨌든 둘째 날은 효소만 먹고 하루를 보냈고,
10시쯤 잠자리에 들어 새벽 2시가 지나 잠이 깼다.
먹지 않았으므로 이 정도만 자도 충분했을 텐데, 조용한 새벽에 두유와 누룽지를 소량 먹고 다시 잠들었다.
셋째 날의 아침은 산책으로 시작되었다.
요즘 자연을 보면 그저 아름답고 좋았었는데,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있어도 감흥이 없었다. 역시 천국과 지옥은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절감했다.
셋째 날까지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같이 피정을 하신 분들이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자고 하셨지만,
커피생각만 나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 카페라테 한잔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우선, 두유와 누룽지를 조금 먹었으니 단식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에 관련해서도 '내가' 비우지 못한 것이다. 비워졌다면 어떤 상황이라도 편견 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아직도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신부님 말씀을 듣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피정은 성공적이 아니었지만, 비우는 것이란 때론 어떤 상황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게 두어야 함을 깨달았던 귀한 시간이었다.
한두 끼, 아니 하루 이틀 안 먹어도 살 수 있는데 끼니를 챙기며, 내가 원하는 이야기만 들으려 하고 원하는 것을 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과 공기는 비워진 곳으로 흐르고, 비워야 진리로 채워진다고 말해놓고 실천은 어렵다.
그동안 글을 오래 쓰지 않은 것도, 말은 소용이 없고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배우는 것은 다시 행동하기 위함이니,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
다음번엔 조용히 신과 단둘이 있기 위해 개인피정을 하러 오겠다고 수녀님께 말씀드리고 돌아왔다.
번쩍이 스승님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도 크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