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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14. 2021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마이너 필링즈 (Minor Feelings)>(캐시 박 홍, 2021)


<마이너 필링즈>의 저자 캐시 박 홍(이하 캐시)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미국 출생이지만, 한국어를 쓰는 가족에 들러 싸여 살았던 그는 영어를 익히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느낌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가 맞닥뜨리게 된 학교라는 첫 사회는 아주 쓴맛을 주었다. 너는 결코 백인이 아니며,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갱신할 수 없는 ID 카드를 발급받은 것이다.     


캐시가 비백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은 거의 매 순간이 자기 검열로 점철된다. 미술을 하다 시로 선회했던 이유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를 언어가 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곧 자신의 언어가 백인중심주의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백인성에 반응하지 않는 자기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뇌했지만,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은 식민화된 내면은 부지불식간에 백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인종에 관해 쓰고 싶다면 예절 바르게 써야 한”다는 오래된 주술 같은 믿음에 그 역시 중독되어 있었다. 망할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겪은 곤경은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문학을 했던 조선 문인들을 연결시킨다. 일본중심주의를 내면화한 조선 문인들은 기꺼이 조선어를 폐기했다. 이등 언어인 조선어로 쓴 문학은 권력이나 명예에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문단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한 글을 썼고 일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로 쓰면서 일본인이 됐다고 착각했다. 차츰 죄의식도 증발되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들었고, 해방이 모두에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문학비평가 김윤식은, 해방 후 일본어로 글을 쓰던 문인들이 조선어로 회귀해야 했을 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이 거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이었다고 전했다. 



식민지 조선 문인과 캐시의 곤경을 잇대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지만, 식민지라는 억압적 역사에 괄호를 치고 나면, 이중언어자가 겪어야 하는 ‘멘붕’엔 큰 차이가 없다. 영혼이 깃들어있는 한국말을 잘라내고 영어를 이식해가는 과정에서 그는 뫼비우스 띠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그런 그가 미국 문단에서 시집을 출간하고 문학상을 수상한다. ‘백인 행세’를 하며 백인에게 아부하는 유대계 백인을 비판하며 기꺼이 ‘노란 별’ 달기를 주창하고 실행했던 유대계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심사로 바너드 여성 시인 상을 받는다. 마침내 작은 성공과 명성이 찾아들었고, 마이크가 쥐어졌다. 


그는 더 큰 명성을 위해 백인 권력의 환심을 사는 대신, 마침표를 찍을 자리에 줄곧 물음표를 새기게 되는 소수 인종 문학의 경계적 정체성을 공론화한다. 소수 인종으로 문학하기가 어떤 복잡하고 중층적인 감정적 위치에 서게 하는지, 그 ‘마이너 필링즈(minor feelings)’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소수 인종으로 문학하기란 곧 ‘마이너 필링즈’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마이너 필링즈’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연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 책의 부제가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인 이유다. 현실의 중첩된 상황은, 그것이 인종 차별이든, 젠더 차별이든, 계급 차별이든, 여전히 차별과 혐오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주입되고 있지만, “많이 좋아졌다”고 믿으라고 강요되어진다. 


이때 예민한 ‘마이너 필링즈’는 뱀의 대가리처럼 고개를 바짝 곧추세우며 들고 일어서서는, 나는 “좋아지지 않았다”고, 나는 “괜찮지 않다”고, 내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고, 오래 묵은 독기를 내뿜게 한다. 맹독이 온 혈관을 타고 퍼져 몸을 태워버릴 위기의 순간, 이를 감지한 ‘마이너 필링즈’ 경고등은 ‘말해’ ‘소리쳐’ 라며 요란히 울려대는 것이다.      


테레사 학경 차의 죽음은 왜 침묵에 싸였을까    

 

캐시의 마이너 필링즈에 관한 토로가 마침내 테레사 학경 차(이하 학경 차)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테레사 학경 차라고? 오래전 책을 통해 우연히 학경 차와 그의 책 <딕테>를 알게 되었을 때(그는 매우 뛰어난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가 강간 살해된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다. 나는 그가 당연히 살아있는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 예술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존 차의 책 <안녕, 테레사>의 출간의 변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존 차는 학경 차의 오빠다. 그런데 그의 책이 학경 차의 죽음 후 사후 부검한 과정을 담은 책이라는 소개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경 차가 끔찍한 강간 살해로 죽음을 맞았다니. 학경 차의 살해 사건 후 그와 그의 가족은 큰 충격과 슬픔에 압도당하고 일상을 상실한다. 하지만 존 차는 그가 범죄의 현장에서 찾아낸 동생의 빨간 장갑을 마음에서 밀어낼 수 없었다. 마치 학경이 끼고 있는 듯 바닥에 솟아 있던 그 장갑은 모두에게 못다 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는 동생 학경 차의 살해 소식부터 강간 살해범이 경찰에 붙잡히고 기소되어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기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해부했다. 이 작업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면, 그의 기록 <안녕, 테레사>는 그와 학경 차의 고통과 피눈물이 밑절미 되어 절여진 매우 드문 애도의 글이었다. 

     

학경 차의 <딕테>에 공명한 캐시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학경 차는 <딕테>의 저자로만 환기되는 것일까. <딕테>의 뛰어남 즉 이중언어자인 학경 차가 천재적인 감수성으로 길어낸 작품성은 소수인종자의 끊임없는 말하기를 제언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의아하지 않은가. 학경 차의 <딕테>는 미국에서 여전히 뛰어난 문학적 콘텐츠의 전범으로 제시되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침묵되어진다. 


“강간 살해라는 추악한 힘에서 학경 차의 예술적 유산을 지키겠다는 각오”는 우뚝하지만, 학경 차가 <딕테>에서 “침묵으로 미학을 다듬고, 생략법을 통해 영어가 동포들이 견뎌낸 역사적 참변을 포착하기에 지나치게 빈약하고 간접적인 매체임을 명백히 한 점”에서, 그의 죽음을 봉인한 주류 예술계의 고집스런 침묵은 그의 작품이 견지하는 ‘말하기’와 ‘드러내기’의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가.     


캐시가 학경 차의 죽음에 관한 침묵을 탐문하다 만난 샌디 플리터먼 교수는, “사람들은 그가 요절했다고만 말해요. 그 참혹함을 절대 거론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 이상한 침묵의 현상은 비단 학경 차의 사건에게서만 감지되지 않는다. 아시아 태평양 성폭력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수 인종 여성 중 특히 아시아계 여성 성폭행 통계가 찾기 어렵고, 아시아계 여성 21~55%가 신체적 성적 폭력을 당하고 있지만 모든 인종 중 성폭력 신고율이 가장 낮다고 밝히고 있다. 


학경 차의 강간 살해 사건이 상당히 큰 사건이었음에도 당시 어떤 보도에도 등장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 샌디 플리터먼 교수는, “그냥 또 다른 아시아 여자로 본 거죠. 만약 그가 젊은 백인 아티스트였다면 아마 온갖 뉴스에 오르내렸을 거예요”라고 진단한다.  

    


학경 차는 <딕테>에서 일본 탄광에 끌려가 스러져간 조선 광부들의 탄광 벽 낙서를 영어로 옮기지 않고 조선어 그대로 담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이를 영어로 옮긴들, 탄광에 끌려가 비참히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그리움과 슬픔과 고독과 절망을 적실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경 차의 어머니는 그의 사후 <딕테>를 읽다 이 부분에서, 학경이 당신에게 속삭이는 것 같아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었다고 했다. 침묵 속에 갇힌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학경 차의 영혼도 무척이나 고독하지 않았을까?      

캐시의 글 곳곳엔, 작정하고 오랜 시간 벼르고 벼린 칼날 같은 날카로운 감정들이 복병처럼  출몰하며 독자를 후려친다. 그가 벼린 예리한 칼날에 베이면 아프지만, 그 상처는 명징하고 선명한 직관을 점자처럼 새겨준다. 좋은 글의 힘이다. 죽었으나 애도되지 않는 학경 차의 이름은 낯선 곳에서 예민한 감정으로 살다 스러진 수많은 경계인들의 영혼을 보듬고 기억하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이너 필링즈’ 또한 세심히 돌아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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