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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Dec 26. 2019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 에피소드 1

    

“우리 젊었을 때 어려웠잖아. 그때 기본소득을 받았다면 좀 멀리 보고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삶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남편이 송년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기본소득 지지자인 나는, 틈만 나면 기본소득 얘기를 남편한테 속살거렸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가,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가 내가 흩뿌린 가랑비에 젖어가고 있었나 보다. 놀라웠고 감격했다.    

 

재작년 일이다. 남편의 일터가 사거리에 위치에 있어 눈에 잘 띈다. 그걸 십분 활용한 나는 그에게 기본소득 현수막을 일터 건물에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별말 없이 달긴 달았는데, 이후로 좀 시달렸던가 보다. 그간의 일화를 우스갯소리로 고백했다.     


기본소득 같은 걸 공짜로 주면 누가 일을 하겠느냐며 노발대발하는 사람. 어느 당 소속이길래  저렇게 빨갱이 같은 걸 달았느냐며 읍박지르는 사람. 여기서 장사 오래 하고 싶으면 저런 시답지 않은 거 당장 걷어치우라는 은근한 협박까지. 그분들이 뭘 몰라서, 남편을 오히려 고무시킨 꼴이다. 약 오르면 오를수록 분기탱천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인데. 그 결과 기본소득 현수막은 제 명을 다하고 지난번 강풍에 내려졌으니 말이다.      


오기만으로 버틴 것은 아닌 듯했다. 드물지만, 어떻게 기본소득 현수막을 걸게 되었느냐는 우호적 호기심을 내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정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시스템이라며 지지를 표명하는 분도 있었다니 말이다. 어쨌든 현수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그간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그가, 난데없이 지인에게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설파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인은 기본소득이란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지라, 설명은 내 몫이었지만, 내가 흩뿌린 가랑비에 속절없이 젖은 남편이 저도 모르게 기본소득을 화두를 꺼내 든 것은 심장 두근거리는 변화였다.     


남편은 뼛속까지 근면인 사람이다. 그의 근면이 가족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그가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평생 일만 하다 죽겠구나 싶었다. 이런 그에게 가족은 미안하고 보다 많이는 가엽다. 얻은 만큼 가져가는 것이 야멸찬 삶의 계산법. 일하느라 챙기지 못한 하나밖에 없는 딸은 아빠에게 결핍을 느꼈다. 그때에 비해 많이 큰 지금도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     


부모의 조력 없이 빈손으로 시작했기에, 남편은 무척이나 억척스러웠다. 남편의 노동 시간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한 십 년 간은 일 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14시간 이상 일했으니 말이다. 무쇠도 녹일 노동 강도였다. 그러다 죽는다고 다그쳐도 소용없었다. 타고난 체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노동의 역사다.   

  

그는 불안했던 것이다. 가부장의 몹쓸 그림자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까지 죽을힘을 다해 일하라고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미안해요, 리키]의 리키처럼, 가족 건사 못하는 가장인 자신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플랫폼 노동자인 리키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 신자유주의의 약탈인 것은 명백하지만, 실업 수당 받는 것을 수치로 아는 그의 남자다움, 가장다움의 족쇄 또한, 그를 궁지로 몬 데 적지 않은 몫을 했을 것이다. 


남편은 기본소득 받는다고 일 안 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의 주변엔 어려운 사람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친구들, 한번 실패로 재기는커녕 평생 낙오자로 살아가는 지인들. 모두 열심히 살았고 살고 있지만, 흘린 땀만큼 되돌아오지 않는 팍팍한 현실을 아프게 목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방도는 없는 걸까. 그렇게 기본소득이 다가갔었나 보다.   

  

# 에피소드 2    


또 송년회 자리였다. 느닷없이 양고기를 먹자는 지인의 제안으로 양고기 식당엘 갔다. 두툼한 덩어리 살이 불판에 올려졌는데 너무 두껍다 싶었다. 익는 거 기다리다 소주만 들이킬 판이었다. 그때 종업원이 와서 두꺼운 고깃덩어리를 가위로 자르려 했다. 익지 않은 고기를 자르는 손목이 하도 딱해 보여 익으면 자르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는 게 이곳의 방식이라나. 남편이 자르겠다고 했더니, 가위질은 본인의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저러다 손목  나가겠네” 내가 걱정을 하자, 남편도 딱했는지 팁을 주자는 제안을 했다. 팁을? 익숙한 일이 아니다 보니 서로 네가 줘라 마라부터, 팁을 주는 최고의 순간까지 투닥투닥 했다. 결국 남편이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자신이 주었다. 그런다고 아픈 손목이 안 아픈 것은 아닐 테지만.

   

활극이 일어난 건 그다음이었다. “생각보다 맛있네” 하며 양고기를 냉큼 냉큼 집어먹고 있는데, 뒤 테이블이 소란했다. 예순은 족히 보이는 남자가 종업원에게 비속어를 써가며 격노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참 한심했다. 만 원이 계산 착오라고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계산 착오된 거야 잘못된 일이다. 그러면 다시 계산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걸 가지고 어린 여종업원에게 욕설을 퍼부을 거까지야 뭐 있나.     


“근데 왜 욕을 하고 난리야”, 내 궁시렁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욕설남에게 이렇게 일갈하는 것이 아닌가? “거 딸 같은 사람한테 왜 욕을 하냐고. 그럴 것 까지는 없잖아요.” 이후 만취한 욕쟁이 남자와 술이 오르기 시작한 열 받은 남자가 어떻게 나왔을지는 굳이 썰을 풀 필요 없을 테고.    

 


‘딸 같은..’ 이란 부분이 맘에 걸렸지만, 예전의 남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페미니스트 마누라가 틈만 나면 지저귀는 소리에 이것 역시 영향을 받은 걸까. 아니면 ‘여자한테 이러는 꼴은 못 본다’는 남성다움의 발현이었을까. 맥락상 야릇하기는 하지만 분명, 남편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식당 서빙은 거의 저임금 여성들로 채워진다. 보호대를 하며 고기를 자르는 손목들. 계산하랴 서빙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다리들, 별일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 을러대는 욕설과 고성에 지친 귀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웃으며 환대해야 하는 얼굴들. 이 여성 노동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때마다 언급했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불평하며. 가끔은 이런 내게 싫은 내색을 하더니, 남편은 언제부터 저런 감수성을 가지게 된 걸까.     


‘페미니스트 모멘트’ 이후로 각성한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남편에게 종알대 왔다. 남성중심성의 폐해에 대해. 간혹 심한 언쟁도 했다. 그런다고 강도를 조절할망정 멈추지는 않았다. 운전을 하다, 영화를 보다, 이렇게 식당에서도 말해야 할 순간마다 읊어댔다. 당신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여자라 함부로 취급당하는 그 사람이 나 또는 딸이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연말 연시 회식으로 어느 식당엘 가나 북적인다.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이즈음이 싫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이들의 노동에 기대 오늘도 즐거운 회식 자리를 마련한다. 회식 자리에서 잠시만 눈을 들려 노동자들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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