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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Feb 20. 2022

'9.9 사건'을 아시나요?

<미싱타는 여자들> (이혁래, 김정영 감독, 2020)


부산 국제 영화제와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기회가 왔다. 게다 출연진과 감독을 만날 수 있는 GV의 행운까지 얻었으니 금상첨화다. 지난 2월 12일 파주 명품 영화관 명필름이 <미싱타는 여자들>을 상영했다. 상영 후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사회로, 출연자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 그리고 감독 이혁래, 김정영이 관객과의 만남을 가졌다.     

 

‘0번 시다’ 대신 이름을 불러 다오      


영화의 제목이 직관하듯, <미싱타는 여자들>은 한국 산업화 시기 청계천 피복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엄연히 이름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0번 시다, 0번 미싱사, 0번 오야’로 불렸다. 누구도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던 청계피복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 노동자였고, 그것도 12살에서 16살 어린 소녀가 상당수였다. 


명백한 미성년 불법 고용이었으나, 1960-70년대 경제 부흥에 주력한 군사독재 정권은 이익 추구에 눈먼 사용자들과 결탁해 어린 노동자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탄압했다. 전태일 열사와 그의 죽음은 당시 불법 노동과 인권침해 그리고 폭압적 노동자 탄압을 압축적으로 설명한 사건이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을 태운 전태일의 희생은 청계피복노동자들을 각성시켰다. 죽음을 불사한 그의 진정성과 희생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역사가, 전태일이 그토록 연민했다는 평화시장 ‘시다’ 여공들을 그저 그의 가난한 풀빵을 얻어먹던 수동적이고 가여운 소녀들로 전유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노동자 정체성이 전태일의 존재에 단단히 발 디디고 있는 것은 자명하겠지만, 열서너 살 어린 나이에 하루 16~20시간 중노동을 하는 노동시장에 진입한 소녀들은, 누구의 누이이기 앞서 이미 노동자였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비좁은 노동 공간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거나 무릎을 꿇은 채 일하다 졸다 다치고, 먼지 묻은 밥을 먹고, 화장실조차 마음 놓고 갈 수 없었던 ‘시다’ 노동자들. 이들에게 가장 큰 꿈은 어서 ‘오야’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소녀 노동자들의 가슴 밑바닥엔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어룽거렸다. 이런 이들에게 “공짜로 공부를 시켜준다”는 노동교실은 그야말로 마른 땅을 때리는 장대비 같았다.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고된 노동 후 두어 시간 정도였지만 정말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거의 매일 이루어지는 잔업으로 고작 이삼십 분밖에 듣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지만, 어린 노동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 교실로 향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학생이 되었다. 


노동교실의 학생으로 ‘0번 시다’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려 지자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사라진 이름이 빼앗긴 권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노동교실을 지키던 이소선 여사의 사회적 모성은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났고, 그곳의 모두는 이미 각자의 전태일이 될 불씨를 발화시키고 있었다. 노동교실은 이들에게 학교이자 집이자 성전이었다.       


반공으로 국시를 삼은 군사독재 정권의 빈약한 통치력은 이들의 가난한 낙원조차 두고 볼 관용이 없었다. 하찮은 ‘공순이’ ‘공돌이’들이 이름을 가지고, 배움을 일으키고, 노동자가 되어 권리를 가지겠다고 나서자, 사용자들은 노예를 잃게 된 백인 주인처럼 채찍과 총을 들었다.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은 노동교실을 ‘빨갱이’ 소굴로 낙인찍고, 경찰을 동원해 정당한 시위와 농성을 무력 진압했다.   

   

난생처음 인간의 품위를 갖게 해준 노동교실을 빼앗기게 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분노한다. 나를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러준 곳, 나에게 처음으로 권리를 알려준 곳, 나를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접해 준 곳, 이런 노동교실을 빼앗길 수는 없다. 


힘없는 노동자들, 게다 대부분이 어린 소녀였던 청계 피복 노동자들은 1977년 9월 9일(이로부터 9월 9일 투쟁을 ‘9.9 사건’이라 이르게 된다) ‘닥치고 투쟁’에 돌입한다. 노동교실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고 어린 노동자 임미경은 다짐한다. “여자 전태일이 되겠다”고.     


9월 9일 그날의 여공들은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싶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인터뷰이 임미경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없이 눈물 흘린다. 그는 ‘9. 9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서게 된 청계피복노동자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법정에 세울 수 없는 미성년의 나이였지만, 군사 정권의 법정은 그의 출생연도를 조작해 법정에 세우고 실형을 선고했다. 


마르지 않고 타고 내리는 그의 눈물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법에 버림받았다는 억울함과 떳떳이 싸웠지만 당당할 수 없었던 서러움이 사무쳤기 때문일까. 당연히 부끄러움은 반인권을 저지른 강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만, 그는 평생 자신의 투쟁을 아이들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은 당당히 싸운 그에게 ‘빨갱이’라는 주홍 글씨를 달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또 다른 인터뷰이 이숙희에게 ‘9.9 사건’은 어떻게 새겨졌을까? 당시 청계피복노조의 상근자였던 그는, 하루가 다르게 좁혀오는 감시망이 힘없는 노동자들을 포획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1977년 9월 9일, 평 노조원들이 지도부에 알리지 않고 노동교실 사수 투쟁을 거행하자, 그는 뻔히 펼쳐질 어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두려웠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농성을 풀었으나 돌아온 것은 매질과 욕 그리고 새빨간 누명이었다. 노동교실과 어린 노조원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은 스스로를 동료들로부터 거리 두게 했다. 그런 그가 영화를 찍은 이유는 당시 노동교실을 함께 키웠던 동료들과 한자리에 모여 그때 다하지 못한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역사가 공인해 주지는 않았어도, 1977년 9월 9일 그날을 함께 한 모두가 서로가 서로의 역사의 증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을 책 <열세 살 여공의 삶>으로 기록한 신순애도 영화에 등장한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기록이 “1960~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의 적극적 주체로 성장한 한 여성 노동자의 생애 경험에 대한 자전적 서술”임을 밝히고 있다. 


객관적 자료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어린 여공의 삶에서, 독자는 한국 경제 성장의 역사에 여성 노동자가 지워지고 없음을 깨닫게 된다. 당연한 듯 남성 노동자로 표상되는 한국 경제 주역의 이미지는 허상이다. 고작 커피 한 잔 값을 한 달 임금으로 받고 노동을 착취당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희생을 누락한 채, 한국 경제 도약을 얘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9.9 사건’이 있기까지 청계 피복 여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노동했고 어떻게 싸웠는지, 그들의 도전과 애환이 <열세 살 여공의 삶>에 생생히 담겨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노조의 노동교실과 ‘9.9 사건’의 객관적 사실 입증에 집중하기보다, 당시 역사의 현장에 있던 여성 노동자들의 생각과 감정을 포착하는데 주력한다. 따라서 영화가 출연진의 회한적 정서로 흠뻑 적셔지지만, 이러한 접근이 그들을 무력하고 가여운 소녀로 소환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들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하지 못한 통한 속에, 인터뷰를 통해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진실 속에, 그리고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수많은 여공들의 수런거림 속에, 그들이 얼마나 당당한 주체로 살고 싶었는지, 그들이 어떤 노력을 통해 노동자로 성장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9.9 사건’을 정점으로 무너지며 그들이 무엇을 빼앗겼는지가 지문처럼 낱낱이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9.9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투쟁’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의 한 인터뷰이는 그들 모두가 전태일이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는 충분치 않다. 그들 모두 누구의 그림자가 아닌 그들 자신으로 우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당당한 노동 운동가의 이름을 찾아 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노동에 빚진 사회의 예의이자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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