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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Apr 02. 2022

'뜨거운 씽어즈', 김영옥 나문희

JTBC <뜨거운 씽어즈> 리뷰


배우 김영옥을 볼 때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그러다 지난해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거의 엄마를 빙의하는 수준이다. 37년생 배우 김영옥은 엄마와 동갑이다.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 그와 엄마가 겹쳐지는 것은 아니다. 38년 생 가수 현미를 보고 엄마를 떠올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영옥의 어딘가에서 엄마의 모습을 문득 번득 마주하기 때문일 텐데, 배우인 그가 해내는 역할이 30년대 생 여성 노인들의 표상을 강하게 연동시키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마우스>에서 봉희 할머니로 분한 그를 보자. 노쇠로 덜그덕거리는 몸을 쉬지 않고 움직여 손녀를 건사하고 악착같이 살림을 돌보는 고달픈 노인 가장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어땠는가. 제살을 떼어 먹이고 사는 잔혹동화 속 엄마처럼, 평생을 뼛속까지 근면하게 살고도 죽는 날까지 못난 아들의 뒤치다꺼리를 마다하지 못하고 헌신하는 가여운 노모를 강하게 환기시키지 않았는가. 


게다 극 중에서가 아니라 진짜로 늙어버린 그의 몸이 보이는 어눌하고 느린 움직임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였기에, 종종 그의 연기는 드라마가 아닌 다큐로 환원되곤 했다. 드라마 속 그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처럼 불현듯, 팍팍하게 살았던 ‘팔자 쎈’ 엄마를 불러들였다.      


그가 ‘천 개의 바람’을 부르자 엄마가 되살아났다   

  

그런 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JTBC 예능 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에서였다. 그는 조금 불안정한 음정으로 조금 미끄러지는 박자로 <천 개의 바람>을 완창 했다. 가난하고 아프고 불쌍한 할머니가 아니라, 팔십 년 넘는 삶을 완성한 수행자의 달관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노래는 오랜 삶을 떳떳하게 살아낸 노인의 존엄을 웅숭깊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감정-감동과 슬픔과 존경이 뒤섞인-으로, 그의 노래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고부터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부른 <천 개의 바람>중, “나의 사진 앞에 서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를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부분에선,  마치 엄마가 당신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내 손 등을 토닥이며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훌쩍이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같이 시청하던 남편의 얼굴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엄마를 기억하고 추모했을 것이다. 김영옥의 노래 <천 개의 바람>은 우리 부부에게, 시름에 젖어 일상을 헤칠까 두려워 마음속 갈피에 꾹 눌러 봉인했던 엄마의 페이지를 열어, 엄마를 기억하고 애도하게 해주었다. 엄마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나도 거기에 있었다. 노래의 힘이, 우레와 같은 성량이나 메트로놈처럼 정밀한 음정과 박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그의 노래가 웅변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노래를 안 좋아한다고 오랫동안 오해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명절이었나, 언젠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오래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끼리 노래방엘 갔었다. 


엄마의 노래를 들어볼 절호의 기회였지만 엄마는 시종일관 자식들에게만 노래시키고 듣기만 하셨다. 무슨 노래를 듣고 싶냐는 내 물음에 엄마는 가수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청했다. <봄날은 간다>나 <동백아가씨> 정도를 상상했던 내겐 뜻밖의 선곡이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노래를 마치자 엄마가 아주 좋아했다. 그때 나는 어둑한 소란 속에 묻혀있던 엄마의 옆얼굴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엄마가 <꽃밭에서>를 좋아하는구나. 이 노래의 어떤 순간이 엄마의 마음을 매혹시킨 걸까. 그때도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하다. 그때 물어봤더라면 좋았을걸, 후회는 언제나 늦다. 그저 엄마의 묘에서 엄마의 ‘최애’곡을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시켜 들려드리면서 혼잣말을 되뇔 뿐이다. 엄마, <꽃밭에서> 왜 좋아했어, 응?      



<꽃밭에서>를 좋아한 엄마   

  

<뜨거운 씽어즈>의 또 다른 고령 참가자 배우 나문희가 선곡한 <나의 옛날이야기>는 엄마의 <꽃밭에서> 만큼이나 뜻밖이었다. 이 모두 분명 노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내 무지와 편견에 기인한 것일 텐데, 노인들께 싹퉁머리 없다는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내 의아함을 뒤로하고 나문희가 긴장으로 손을 뒷짐 졌다 풀었다 하는 동안 전주가 흘러나왔고, 그의 노래가 고즈넉이 시작되었다. 


소심한 듯 덤덤한 듯 자분자분 얘기하듯 풀어내는 그의 노래는, “잠깐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이렇게 늙어버렸다”던 엄마의 황망함처럼, 어느새 멀리 달음박질쳐버린 젊은 시절의 자신을 건널 수 없는 강 저 너머에 세워두고 바라보는 듯한 아련함으로  술렁였다. 엄마가 <꽃밭에서>라는 노래에 늙어도 늙지 않는 고동치는 맥박 같은 감정을 매설해 두었듯이, 나문희의 <나의 옛날이야기>에도 친애하던 자신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묻혀있었다.      


<뜨거운 씽어즈>에 도전한 팔순의 두 배우의 참가 동기는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노인의 표상을 보란 듯이 걷어차 버렸다. “할머니들이 집구석 나와” “우리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들의 동기는 자신들의 버킷리스트를 성취하려는 더 젊은 참가자들의 호연지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부담과 짐으로만 여겨지는 ‘늙은이’라는 딱지를 단호히 거부하는 두 배우의 호방함은, <함께 삽시다>의 박원숙이 “몸이 늙는 거지 마음은 그대로”라고 일갈하는 노년의 변과 맥을 같이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늙는다고 희로애락의 가파른 감정이 가뭄에 메마른 냇물처럼 싹 말라버리는 것이 아닐진대 말이다. 그들의 오롯함은 늙는다고 느닷없이 무성(無性)의 무욕망(無慾望)의 존재가 된다고 믿는 젊은 세상을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 듯하다.      



<뜨거운 씽어즈>의 참가자들 모두 나름의 이유로 노래에 도전하고 있다. 어떤 이의 동기는 호소력이 있었고 어떤 이의 동기엔 치기가 엿보였다. 하지만 모두 노래를 향한 강한 정동을 품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도전이 개인기를 발휘하고 성취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노래를 향한 열망에 더하기 빼기를 순도 높고 치밀하게 완성시켜 합창의 본령인 합일에 도달해야 한다는 데 있다. 서로 다른 높낮이나 볼륨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면서, 이들은 어떻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 합일의 장에 두 노배우의 역할이나 분량 또한 나이로 가감하는 법 없이 평등하고 아름답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내 가장 큰 기대와 진심은 두 노배우의 활약과 성취에 있음을 솔직히 밝혀두며, 이들의 도전이 노년마저 자기계발의 도구로 이용하는 얄팍한 자본의 상술을 멋지게 배반해 주길 바란다. 이 도전이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 낭비되기에는 두 배우의 시간이 짧다. 


이들의 말처럼 “행복하고 싶어서” 노래하고, 이를 통해 늙어가는 일이 ‘뒷방 늙은이’가 되는 수순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세상으로 한 걸음 더 용기 있게 나아가는 일이라는 걸 우뚝하게 보여주길 바란다. 끝으로 돌아가신 엄마와 엄마의 노래를 소환해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게 해 준 두 배우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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