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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Dec 28. 2022

조선 최초 경제학자 최영숙의 삶을 재조명하다!


입소문을 타고 있는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2부는 일제시대 직업여성을 다룬다. 가부장의 집을 떠나고 싶었던 ‘모단 걸’들은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길로 나섰다. 직업여성이란 말 그대로 직업을 가진 여성이란 뜻이지만, 이 말이 훗날 묘한 뉘앙스로 변질된 것은 딸의 독립과 자유를 억압했던 아버지의 계략일 것이다. 다큐는 ‘데파트 걸’(백화점 점원)에서 기자로 활약한 송계월, 미용실을 경영한 오엽주, 택시 기사였던 이정옥 등 선구적 삶을 산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이중 필자의 눈을 끈 여성은 최영숙이었다.     


최영숙(1906-1932)은 시쳇말로 스펙이 대단한 여성이었다. 시대 상황을 반영해도 독보적 이력이다. 일제 시대 조선 청년의 유학은 일본이 주를 이루었다. 해방기를 거치며 미국 등 서구 유학이 늘었지만 당시 스칸디나비아로 유학 다녀온 이는 최영숙이 유일하다. 게다 그가 공부한 학문이 경제학과라는 것은 더욱 특별하다.      

필자가 최영숙이란 이름을 새기게 된 계기는 2018년 출간된 책 <네 사랑받기를 허락지 않는다>를 알게 되면서다. 일제 시대 스웨덴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여성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시대 그 먼 나라에서 한국 여성이 스웨덴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부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과 달리 책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러다 제 14회 여성인권 영화제에 그의 삶을 다룬 짧은 애니메이션 <영숙>을 만났다. 기뻤다. 그에 관한 책과 애니메이션 모두 무척 짧았는데, 그가 요절한 탓도 있겠지만, 그에 관한 자료가 많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러모로 아쉽던 중 최영숙에 관한 연구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지금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이효진 교수의 연구 논문이었다. 그는 “한국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 그리고 사망 후 가십으로 다뤄진 그와 인도인의 연애사 등이 전부”인 국내 최영숙에 관한 자료를 재조명하고자, 스웨덴의 아카이브, 신문기사, 잡지 등을 탐구해 스웨덴에서의 그의 삶을 재발굴했다.   

   


스웨덴으로 날아간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최영숙     


최영숙은 190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에서 여주공립보통학교와 이화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2년 중국 남경 명덕학교에 입학한다. 1년간 수학한 후 남경 회문여학교로 옮겨 공부하다 1926년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도 담대한데 스웨덴이라니, 당시 신문도 그의 특이한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스웨덴 입국 당시 그의 비자와 그가 쓴 입국 기록으로 볼 때 출생연도는 1906년이 맞는 듯하다. 국적이 중국으로 되어있는 건 일본의 유학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조선 청년들의 방편으로 보인다. 비자 신청 목적은 공부(study)고 직업 또한 학생이다. 스웨덴 입국 후 그는 시그투나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며 시그투나 인민학교에서 약 1년간 스웨덴어를 익힌다. 


스웨덴어에 익숙해지자 그는 스톡홀름대학에 지원하지만,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점이 부족해 입학하지 못하고 스톡홀름의 <사회정치와 정책 연구소>에 입학한다. 그가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이곳에서 2년간 수학 후 졸업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스웨덴을 택했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에 관한 기록은 그가 일찍이 스웨덴의 유명 작가인 엘렌 케이를 흠모했음을 드러낸다. 엘렌 케이는 당대 매우 저명한 작가로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여성의 참정권과 결혼 등에 관한 글로 신여성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글이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니 최영숙이 이를 접하고 그에게 감화 받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가 스웨덴이란 낯선 나라를 택한 것엔 엘렌 케이의 영향이 컸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면서 자신의 스웨덴 유학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엘렌 케이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중한 병중에 있던 엘렌 케이는 최영숙의 간절한 편지에 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최영숙은 포기하지 않고 용감히 스웨덴으로 향한다. 

     


스웨덴에 입국한 최영숙은 중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스웨덴 기독교 단체인 K.F.U.K.의 대표인 엘사 세데그렌 공주를 만나게 된다. 그는 갑자기 등장한 동양 소녀에 당황하지만 최영숙을 환대한다. 그는 최영숙의 보증인이 되어 시그투나 인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엘사 공주가 최영숙의 출현에 놀라긴 했지만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그가 이미 1925년에 조선을 방문해 스웨덴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조선의 여학교를 방문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엘사 공주에게 조선 신여성이 아주 낯선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시그투나에 적응한 최영숙은 학업과 일상에 모두 열심이었다. 시그투나 학교의 교장이었던 하날드 달그렌은 동양인으로 최초이자 유일한 유학생인 최영숙의 열정을 높이 샀고, 하날드 달그렌 가족과 최영숙은 매우 가까이 지냈다. 하날드 달그렌 교장이 최영숙의 갑작스런 죽음에 부친 추모글은 그가 매우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학생이었고 조국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남달랐다고 쓰고 있다.      


시그투나에 머물면서 최영숙은 조국의 현실을 알리는 데 힘썼다. 그가 시그투나 학교 잡지에 투고한 글 <조선의 청년들>은 일제의 압제에 놓여있는 청년의 현실과 이에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얻기 위해 매진하는 청년들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스웨덴 일간지와의 인터뷰 <행복하고 행복한 스웨덴 여성들>에서도 일제의 무도한 억압상을 고발하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명했다. 또한 스톡홀름에서 수학하는 동안 스톡홀름 대학교 여성 모임의 멤버로 활동하며 한국을 알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조선의 신문이나 잡지가 알린 스웨덴 황태자와의 인연은 그가 황태자 구스타프 6세의 도서실에서 단기간 일했던 경험을 추측으로 쓰인 듯한데, 직접적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시그쿠나 학교를 마치고 <사회정치와 정책 연구소>에서 공부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이주한 최영숙은 이곳에서 사회경제학과 노동, 복지 등을 공부한다. 그는 잉게보리 라손 교수의 노동 연구 그룹 활동에 참여하며 노동과 경제 사회복지 등에 눈뜬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2부가 소개하듯이, 그가 조국에 돌아와 콩나물을 팔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당시 고학력 여성이 일할 곳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콩나물 점포를 통해 스웨덴에서 공부한 경제학을 소비자 조합운동이나 무산 부인 운동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구상도 있었을 것이다.       


최영숙은 마침내 학업을 완수하고 1930년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졸업 후 귀국하기 전인 1931년 그는 파리 ,제네바, 예루살렘 그리고 캘커타를 방문하기로 한다. 인도에서는 친분이 있던 인도 여성 독립운동가 나이두와 만나고 간디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교류를 넓히며 4개월간 머무른다. 이때 한 인도 청년과 교제하게 되고 임신한 채 귀국한다. 그곳에서 결혼을 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최영숙의 열망은 뜨거웠고 도전은 용감했지만, 운명은 그가 담대한 꿈을 펼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진 최영숙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쳤다. 애달프다. 그가 귀국해 운명하기까지 조선의 신문과 잡지는 그의 이상과 성취보다 그의 연애사에 집중했다. 그의 임신을 두고 벌인 숱한 가십성 기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타국에서 고군분투한 한 여성의 삶을 방종한 여인의 일탈로 소비하고 말았다. 


이는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1부에서 다룬 최초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이 식민지 조선의 남자 문인들에게 여성 혐오로 희생당한 경로와 유사하다. 식민지 조선의 이등 국민 남자들은 피압박민의 식민지성에 항거하는 대신, 여성 혐오의 휘장을 두르고 여성이라는 식민지를 착취했던 셈이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1부에 등장하는 패널들은 여성 독립운동가 세 명을 호명하라는 요구에 선선히 응하지 못한다. 남성 애국지사들을 좔좔좔 대면서도 여성 독립운동가 세 명을 쉽게 호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가 그들의 이름을 지웠기 때문이다. 


다큐 1부 말미에는 빛바랬으나 눈빛은 아직도 형형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비춘다. 잊지 말아야 할 얼굴들이다. 이들의 우뚝한 이름을 자주 불러보자. 세 명이 아니라 삼십 명 삼백 명의 여성 선구자들의 이름을 술술 불러낼 때까지. 기억되어 불린 존재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 참고 자료 : <신여성 최영숙의 삶과 기록: 스웨덴 유학 시절의 신화와 루머, 그리고 진실에 대한 실증적 검증, 이효진, 아시아여성연구 제 57권 2호> <스웨덴 소장 신여성 최영숙 관련 자료 소개 (1), 이효진, 이화사학 연구 제 62집> <스웨덴 소장 신여성 최영숙 관련 자료 소개 (2), 이효진, 이화사학 연구 제 64집> <네 사랑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최영숙, 가갸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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