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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an 29. 2023

채식주의에 찬성하면서 고기를 먹는다

<채식의 철학> (토니 밀리건, 2019, 휴머니스트)


독서모임에서 이번에 선택한 책은 <채식의 철학>이다. 채식주의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대충 알고 있었다.      


채식은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주제지만, 책을 시작하기가 영 찜찜했다. 이는 분명 채식을 좋아하지만 육식 또한 멀리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께름함일 텐데, 읽는 내내 시달릴 양심의 가책에 미리 도달했기 때문이다. 게다 때가 어느 때인가. 기름진 고기 음식을 가지가지 만들고 먹어대는 명절이 아닌가.     


육식을 중단하기 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줄이기 시작한 건 오래전 <잡식 가족의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다. 쿠폰 모아 치킨 시켜 먹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희한할 정도로 육식을 대단히 즐기지는 않는 집이지만, 어쨌거나 다큐멘터리는 육식을 조금 하는 경우라고 마음이 불편해지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후로 건강에도 좋다며 채식에 대한 관심이 늘기 시작했다. 인간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인간 중심 가치관을 배격하는 종차별주의 논쟁이 대두해 동물권에 대한 고찰이 생겨났고, 기후위기라는 인류의 대 재앙 앞에 소 돼지 등의 육류 생산 시스템이 탄소 배출의 주범으로 등장했다. 육식은 이래저래 사면초가에 처해졌다.  

   

책을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모임 회원들로부터 책 읽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들이 카톡방에 오르기 시작했다. 책 제목의 ‘철학’이 무늬만 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득 유명 극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의 전공이 철학이었는데, 뭔 주장을 하려면 공기 들어갈 틈도 없이 논리를 세워야 하는 바람에 머리에 쥐가 나더란다. 티는 낼 수 없고 숨은 막히고, 그럴 때마다 강의 중간에 화장실로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이었다. 


철학 논리에 훈련되지 않은 회원들이 철학자의 논리를 좇아 해독하느라 책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한숨 쉬며 다시 읽기를 반복했겠는가.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채식주의에 대한 성찰을 마주하며 잔뜩 준비한 명절 고기 음식 보는 게 더 고역이었다.     


채식을 해야 하는 여러 이유 그러나...

 

책은 육식에 관한 논쟁 전반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저자 토니 밀리건은 닥치고 채식하라는 압박 대신, 채식의 찬반에 대해 여러 가설을 세우고 이를 혁파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그는 나 같은 어설픈 채식찬성주의자, 그러니까 채식을 찬성하지만 고기는 완전히 못 끊는 사람들의 오류를 ‘동기부여 판단 내재주의’에 입각해 파헤친다. 


어떤 사안에 판단을 내리는 것과 행하려는 동기를 갖는 것이 연결되지 않는 모순은 유구히 이어져온 육식 관행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한다. 육식뿐 아니라 채식 역시 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식습관이지만(한국도 육식 관행이 더 뿌리 깊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독 육식만을 전통 관행이라 믿으려 하는 태도는 실은, 나 먹고 싶은 대로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욕망을 숨기기 위한 편향인 것은 아닐지.    

   


알려져 있듯이 채식주의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 채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완전채식주의도 상세히 살펴보면 완전이라는 말을 쓰기가 좀 애매한 경우도 있다. 진짜 에일 맥주가 어류에서 추출한 부레풀로 정화 처리되고, 맥주의 거품을 적당히 통제하기 위해 동물에서 추출한 글리세릴 모노스테아레이트같은 화학 작용제가 들어가기도 한다. 또 부분 채식주의가 이 정도는 괜찮겠지 허용하는 우유나 계란 등도 우유를 착유하는 과정 그리고 계란을 공급하는 닭들에게 공급하는 사료 역시 육류 생산 시스템의 사슬과 무관하지 않다.  

    

육식을 금하자는 대 명분 중 하나에 친환경 논리가 버티고 있는데 여기에도 야릇한 구석이 있다. 환경을 위해 로컬푸드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지만, 때로 로컬 푸드가 에너지를 많이 쓰는 방식 등 친환경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어떤 면에서 육식주의자는 곡물 대리 소비자이기도 한데, 소 등의 동물에게 제공되는 곡물사료가 인간이 소비하는 양의 5배를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에 입각해 친환경적으로 소를 방목해 키우는 경우, 이를 소비할 사람들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줄 수 있지만, 방목 소들이 집단 사육 소들보다 몇 배의 메탄가스를 방출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썩 편치 않다. 결국 환경에 대한 호소로 육식 소비를 줄이겠다는 시도는 육류 생산 시스템을 친환경적으로 개선해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킨다는 면에서, 육류 소비를 줄이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결국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냐 하면, 저자는 보편적 채식주의로의 대전환에 있어 고민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보편적 채식주의로의 전환에는 상당히 복잡한 상업적 교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곡물이 재배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경우 상당량의 곡물 들을 수입해야 하는데, 이는 쉽지 않고 이동을 하면서 많은 탄소가 배출된다. 육류 생산에 필요한 곡류를 재배하기 위해 그리고 채식주의 전환으로 더 많은 곡류를 생산하기 위해 단일재배가 확장될 경우, 이는 생태계와 야생동물에 재앙이 될 수 있다.


즉 보편적 채식주의라는 단일한 원칙을 완수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합리적 대응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이 공통으로 겪는 곤경을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과정에는 “다른 상황과 다른 개인에 의해 다른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고, “특정한 것이나 독특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다 유튜브에서 본 한 공동체의 식생활이 떠올랐다. 곡물이 자라기 힘든 척박한 환경에 사는 이들에게 양의 젖과 고기는 매우 중요한 음식 자원이다. 이들에게 완전 채식주의로의 전환은 가능하지도 않고 유의미하지도 않다. 


또한 자급자족으로 농사짓고 목축 하는 경우, 이들의 육식이 누구의 무엇을 착취하는 해악이 되는가. 결국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곱씹어 볼 부분은 이렇다. “윤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음식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들 간에, 또는 다른 생물이나 환경 일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확립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거 중에 가장 뜨끔했던 부분은, 육식주의자인 당신은 동물 실험을 반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동물을 비인격적으로 사육해 한 해만도 수십만 마리를 도축해 먹고 있는 인간이 이에 미치지도 못하는 수의 동물이 실험에 쓰이는 현실에 대해 무슨 논리로 반대의 입장을 세울 것인가. 골똘히 생각해도 그럴듯한 대답을 끝내 찾지 못하던 나는 서늘한 기억으로 옮아갔다. 구제역으로 소 돼지를 살처분 할 때의 광경들이다.


살처분 방식의 찬반을 떠나 사람들은 살처분되는 장면에 충격받았다. 그리고 소나 돼지를 기르던 주인들은 내 새끼 같은 것들이라며 통곡했다. 충격받은 사람들과 소나 돼지를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솔직히 혼란스럽고 의아스러웠다. 슈퍼마켓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를 사는 우리는 도축의 진실에 의도적으로 무지할 뿐이다. 살처분되던 동물들이 도축되는 동물보다 어떻게 더 비참했다고 느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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