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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15. 2023

이태원, 홍대 그리고 파주, '폭력적 상상'의 기지촌

<동맹의 풍경> (엘리자베스 쇼버, 2023, 나무연필) 서평 에세이

   


<동맹의 풍경>은 오슬로 대한 교수인 엘리자베스 쇼버가 2007년부터 약 2년간 한국에 머물며 관찰 기록한 기지촌(이태원)의 풍경이다. 꽤 오래전의 풍경이긴 하지만 아직 빛바래지 않았다. 저자는 기지촌을 떠올리는 한국인의 ‘폭력적 상상’을 밀도 있게 파헤치면서 잊을 수 없는(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름 ‘윤금이’를 호명한다. 미군에 의해 충격적이고 잔혹하게 그리고 상징적으로 살해된 기지촌 여성 ‘윤금이’. 그를 경유해 도달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살아서는 그를 ‘양공주’로 부르며 천대해놓고 죽어서는 ‘민족의 딸’이라고 불렀다.      


미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윤금이’의 사진은 죽자마자 날것 그대로 떠돌았다. 그가 당한 성폭력과 살해의 피해를 보고서 마치 처음 일어난 기지촌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본 듯 화들짝 놀란 사람(남자)들은 ‘양키 고 홈’과 ‘Fucking USA(미국(여자)을 강간하자)’를 외쳤다. ‘윤금이’를 진심으로 애도하기도 전에 사람(남자)들은 조국의 여자가 ’미국 놈‘에게 당한 것만을 분해했다. 민족(남자들)의 오욕이라 부르르 떨면서 애도 대신 민족주의를 끌어와 그를 두 번 죽였다.   

   

이를 기점으로 미군에 대한 ‘폭력적 상상’은 때때로 사실과 무관하게 증폭되었다. 미군에 의한 폭력이 없거나 사실무근이라는 말이 아니라, ‘미군’하면 ‘윤금이’로 심상이 옮아가며 미군 혹은 미국이 범죄자나 악마의 얼굴로 대체되며 반미 감정으로 축적되었다는 뜻이다.


기지촌은 민족을 유린한 금지된 곳이 되었고, 미군/한국 여자/한국 남자라는 세 주체의 긴장이 형성되는 장소로 전유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윤금이가 죽은 그때(1992년) 이미 수도권 변방의 기지촌은 쇠락 일로에 있었고, 이미 상당수 한국 여성이 외국인 여성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유령이 된 ‘민족의 딸’을 소환해 민족주의를 부활시킨 셈이다.     



‘윤금이’가 살다 죽은 기지촌 동두천이 미군 철수로 쇠락하자, 미군들은 이태원과 홍대로 진출한다. 서울 한복판으로 나아간 기지촌엔 한국인 성매매 여성 대신 외국인 성산업 종사자들과 외국인 특히 미군과 성적 쾌락을 즐긴다고 여겨지는 젊은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완전한 피해자여여만 하는 기지촌 여성 대신 자발적으로 섹슈얼리티를 향유하려는 젊은 여자들에게 외국 남자를 탐하는 타락한 ‘신종 양공주’라는 낙인이 옮겨 찍혔고, 이를 마치 사실인 양, 범죄인 양, 민족의 수치가 반복되는 양, 과장되고 왜곡된 보도가 한동안 넘쳐났다.      

그러나 저자가 2007년에 목격한 이태원이나 홍대는 ‘폭력적 상상’인 공간으로서의 기지촌의 색깔이 흐릿해져 있었다. 미군, 게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시시때때로 헤쳐 모여를 하며 계급 인종 국적이 다양한 혼종성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한국 남자 대 미국 남자라는 긴장이 느슨해지고 이방인과 이주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상호작용하는 곳이 되었다. 


저자는 기지촌 여성들을 대체한 외국인 성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군 주둔이 불러온 글로벌 성노동의 이동 양상과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 성노동자 여성들의 불안정한 위치와 ‘몰두’하는 삶을 들여다본다. 저자가 밝히는 이태원과 홍대의 혼종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그의 통찰에 기대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을 둘러싼 ‘폭력적 상상’이 내가 사는 지역 파주에 어떤 형태로 부유하는지 말해 보고 싶다.      


기지촌 파주     


파주는 기지촌이 성행했던 곳이다. 오래전 미군이 떠났지만 도시 여기저기 아직도 기지촌의 흔적이 역력하다. 반환됐지만 쓰임 없이 방치되어 폐허가 된 옛 미군 기지들과 기지촌이 성행했을 때를 짐작할 만한 쇠락한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이곳에 ‘민족의 딸’에 대한 추억은 없으며 오래전 이곳에서 생활하던 기지촌 여성들은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기지촌 여성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을 인정했지만, 어느 정부 인사나 지자체장 등에게서 역사적 책임이나 국가 폭력을 통감한다는 사과의 말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가 던진 ‘폭력적 상상’이라는 화두를 파주에 펼쳐보니, 그 양상은 그가 관찰한 이태원이나 홍대 등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그리고 미군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파주에 민족주의적 ‘폭력적 상상’이 끼어들 여지는 적다. 미군 철수로 기지촌이 쇠락함과 동시에 기지촌 여성들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윤금이’ 사건이 난 그때 파주 기지촌은 이미 비어 있었고, 그 공동화는 역사의 반성과 성찰 대신 박탈감을 가져왔다. 미군이 계속 주둔했다면 누렸을 부를 빼앗긴 심정이 박탈감의 근원일 텐데, 기지촌 주민들이 누렸을 부가 어디에서 이전됐겠는가를 생각할 때 착잡해진다.      


파주 전 지역이 미군과 기지촌 여성에 기대 먹고살았지만 이를 기억하는 방식은 자기 부정적이다. 기지촌 역사를 담은 아카이빙 속 시민들의 기억은 한결같이 “그때가 좋았지”라는 식으로 낭만적으로 추억될 뿐, 빛의 한 편인 그림자에 대한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빛 이면에 있던 사람들(기지촌 여성, 혼혈인 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이는 없다. “그때는 좋았지”는 기지촌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의 추억으로, 이들은 과거의 영광을 언급하면서도 간간이 가난하게 살았던 당시의 자신들을 애달파했다.


 이런 자기 연민에 반해, 그때는 매몰찼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양갈보’라 천대했던 그들에게 미안했다는 감정은 스치듯이라도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들보다 더 잘 먹고살았다는 기억을 끄집어내 강조하기조차 한다. 잘 살았던? 그들이 지금 왜 저리 가난하고 외롭게 살고 있는지는 그들의 잘못된 선택일 뿐 자신들과 무관한 일로 여겼다. 쉽게 돈 벌려는 타락한 여자들로 단정된 ‘상상된 폭력’이 비틀린 채 지역에서 부유한다.      


시민의 생애사는 기록되지만, 기지촌 여성의 기억을 아카이빙 하는 것은 시도되지 않는다. 우선은 ‘윤금이’로 상징되는 민족의 피해자이기만을 요구하는 증언이 당사자들에겐 가해인 일면이기에(누구든 비참한 과거를 복기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겠는가) 어렵다. 둘째는 그저 생활인으로 살았던 일상을 구술한다는 것이, 특히 미군과 지지고 볶고 살았던 삶을 발화하는 것이, 상상되거나 허용되지 않는다. 왜일까?     



지역의 어떤 이는 파주 기지촌 자체를 그리고 기지촌 주민들을(때로 기지촌 여성들을 포함해) 모두 피해자라고 말한다. 절반만 동의한다. 어떤 삶도 피해자이기만 한 인생은 없다.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이지만 관계 속에서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라고 늘 피해자 정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한때 고된 역사의 풍파 속에서 생존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가해에 가담했을 수 있겠다. 그렇다고 ‘그땐 다 그랬고 나도 피해자니 더는 따지지 말자’고 과거를 뭉갠 채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다. 피해는 피해고 가해는 가해다. 이 교차를 인정하고 성찰할 수 있을 때에야, 나만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기지촌의 유산


파주에는 여전히 군부대가 산재해있고, 시민의 출입이 부자유한 민간인출입통제지역엔 제거하지 못한 지뢰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전쟁은 멈췄고 미군은 떠났지만 전국토를 병영화한 군사주의는 후미진 곳의 흔적까지 모두 거둬내지 못했다. 이 흔적들은 마땅히 역사적 사회적 성찰의 도구가 되어야 했지만, 추억으로 낭만화되어 떠돈다.      


밀려든 미군이 기지를 세우기 위해 마음대로 쫓아낸 논밭에 기지촌이 세워졌다. 농사짓던 시골마을이 도시화 과정을 누락한 채 갑자기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윤락촌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 미군이 쏟아내는 달러를 주어 담느라 바빴다. 미군에 의한 범죄가 종종 일어나고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함구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엄혹했기 때문이다. 침묵의 시간을 지나 미군이 떠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폭력과 상실의 시절은 “그때가 좋았”던 화양연화로 변형된 채 기억된다.      


기지촌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았던 어떤 노인은 기지촌 여자들이 없었다면 양가의 젊은 여자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란 ‘상상된 폭력’을 아직도 사실화한다. 그래서 말처럼 양가의 여자들을 지킨 것이 기지촌 여자들이라면 이들에게 수훈을 돌려야 하지만, 지켜야할 여자들의 정조를 위해 대속된 여자들은 그때도 지금도 ‘양갈보’다.   

   

이 혼돈의 기지촌에 미군이 떠난 후 파주 기지촌도 사라졌으면 어땠을까 종종 상상해본다. 그러나 끈질기게도 기지촌 용주골의 한국인 지역(기지촌이 성황일 때 용주골은 백인 미군을 상대하는 백인 지역, 흑인 미군을 상대하는 흑인 지역, 한국인 남자를 상대하는 한국인 지역으로 나눠졌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지금의 성매매 집결지라는 유산을 남겼다. 이 공간은 지역에서 어떻게 성찰되고 조명되어야 하는 게 마땅할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버젓이 윤락행위등금지법을 만들어 성매매를 금지했지만, 기지촌은 특구로 만들어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승인하고 권장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몸(성병)을 정기적으로 강제 검진해 깨끗한? 몸을 유지시켜 미군에게 제공함으로써 달러를 벌어들이게 했다. 이것이 국가가 포주였던 기지촌의 진실이다. 여성의 몸을 매개해 미군의 주둔을 유지시키고 정부의 부족한 곳간을 채웠다.     

 

여성의 몸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아 국가 안보와 재정을 유지시킨 남성 중심적 폭력이 기지촌 여성 피해의 실체다. 국가가 관리했던 파주 기지촌은 성매매 집결지라는 비틀린 형태로 지역에 남아 70년 넘게 유지되며 여성들을 폭력에 두었지만, 지역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공동체 모두의 책임으로 해결하자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파주시가 이제 와서 성매매 집결지가 불법이고 그곳에 있는 여성들도 불법자이니 이곳을 밀어버리겠다고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을 겁박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이 폭력을 비판 없이 수용해도 괜찮은 걸까?     

 

<동맹의 풍경>이 그리는 ‘폭력적 상상’은 이태원과 홍대라는 매력과 거부감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글로벌과 로컬이 교차하며 펼쳐지지만, 이곳 파주에선 지역 이해집단의 이기심과 정치인이 치적을 세우려는 아집이 엉켜 상상이 아닌 현실의 폭력을 낳으며 위태롭게 벌어지고 있다. 


해체되거나 철거되었던 성매매 집결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관의 일방적 철거 압력은 집결지가 기지촌이 낳은 유산이라는 역사를 깡그리 뭉갠 채 집결지 여성들을 불법자로 추방하려 한다. 추방당할 이들에게 불릴 이름 같은 것이 있을까. ‘민족의 딸’도 가당치 않지만, ‘누구의 딸’로 불리는 것도 부정의하다. 옛 기지촌 여성들에서 지금의 이들까지, 이들이 원한 것은 단지 살아가는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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