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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26. 2023

미국 땅에서 고군분투한 기지촌 여성의 삶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2023, 글항아리)


비가 무섭게 때리던 지난 토요일 부고를 받았다. 파주 기지촌 생존자였던 한 분이 임종했다는 소식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장례식장 로비에 들어서자 고인의 영정사진과 빈소를 안내하는 알림판이 보였다. 알림판엔 한국 이름 대신 기지촌에서 불렸던 영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른 조문이었는지 조문객은 없었다.      


한 ‘전쟁신부’의 삶과 조현병 


한때 고인도 ‘전쟁신부(War Bride)’를 꿈꾸었을지 모르겠다. 다른 삶을 갈구하는 많은 기지촌 여성들의 희망이었으니까. 이런 여성들의 꿈과 달리 ‘전쟁신부’와 ‘GI베이비’는 “양부인과 혼혈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로 여긴” 당시 정부가 단일민족국가 신화를 지키려는 기획으로 진행되었다. 1950년부터 미국에 도착한 신부들은 약 십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국의 고난을 피해 미국에 도착했지만, 곧 “새로운 곤경들, 가난, 성차별, 인종 차별, 이혼, 심한 외로움”등을 직면하게 된다.      


<전쟁 같은 맛>을 쓴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교수인 그레이스 M. 조의 엄마인 군자 씨도 이 행렬에 선 신부 중 한 사람이었다. 조교수가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다. 어릴 때 학교에서 한 아이가 “너희 엄마 전쟁 신부였어?”라는 물음을 듣고 부모에게 묻자 얼버무리는 게 께름했지만, 엄마의 역사를 파고들기엔 어렸다. 


엄마는 당시 이민자나 아시아인이 단 한 명도 없던 마을에 정착하면서부터 백인 주류문화에 압도당했다. 마을의 유일한 이민자이자 한인이었던 이들 가족의 삶 자체가 ‘마을의 스캔들’일 정도로 만인의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는 이민자의 고유한 정체성 따위는 무시했고, 당연한 듯 동화를 강요하며 제대로 된 미국인이 되는지 감시했다.     


억압이 부당했지만 군자 씨는 드러내지 않았다. 백인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는 척 위장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전쟁신부’들이 취한 ‘저자세 저항’ 전략이었다. 남편이나 미국 주류 문화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여 안심시키는 한편, 한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집요하게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주로 음식으로 표출되었다. 


군자 씨도 그랬다. 빠르게 익힌 요리로 솜씨 좋게 미국식 식탁을 푸짐하게 차려내면서도, 한국 음식 특히 김치를 빼놓지 않고 식탁에 두었다. 군자 씨 스타일 퓨전 메뉴와 한국인의 음식 정서인 “원 스푼 노 러브”(한번 주면 정 없다)로 식구들을 먹였다. 그에게 음식은 존재 증명이었고 희망이었다.     


군자 씨는 고군분투했다. 자신의 과거를 상쇄하는 일은 아이들을 성공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야간 근무하는 직장(좋은 직장에 한국 이민 여성이 취업하기는 불가능했다)을 11년간 다녔다. 고된 노동 후에도 들로 나가 블랙베리와 버섯 등을 채취해 이를 팔아 수입을 올렸다. 하루에 고작 서너 시간 자면서도 아이들의 끼니엔 언제나 정성이었다. 바삐 살면서도 동네에 나타난 한국인 입양아에게 김치를 먹여 영혼을 달래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열심이던 군자 씨에게 위기가 닥쳤다. 조교수가 열다섯 군자 씨가 마흔다섯이던 1986년, 군자 씨가 이상해졌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열심이던 채집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혔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노리고 있어”라며 편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혼잣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에게만 말을 거는 ‘오키(옥희)’와 나누는 대화였다.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오키’는 누구이고 왜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군자 씨의 이상을 감지한 어리지만 총명한 그레이스는 심리학 책을 몇 권 독파한 후 그의 증상을 조현병으로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조현병에 관한 책은 그의 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주류 정신의학이 주장하는 조현병 청소년기 유전학적 발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현병 발발이 가족력 때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이 기준으로는 당시 45세였던 군자 씨에게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붙일 수 없었다. 또한 조현병의 원인이 단지 유전학적이라면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뜻인데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는 엄마의 광기를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의 병증에 호전이 없던 어느 날 그는 올케로부터 “어머님이 매춘을 하셨었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충격이었다.    

  


엄마가 매춘부였다는 과거는 그를 분열시켰다. 온갖 상상이 매일 밤 꿈에 재현되었다. 그러다 과거의 기억 속에 호명되었던 ‘전쟁신부’가 떠올랐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늙은 아버지와의 결혼 그리고 기억 한 편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아내 폭력도 끄집어 올려졌다. 아버지와의 결혼에서 낳은 아이가 아닌 혼혈이었던 오빠의 존재와 어릴 적 동네의 수군거림과 엄마의 조바심, 이 모든 과거가 엄마의 조현병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역사와 조현병과의 연관성을 좇던 조교수는 군자 씨의 생애가 그저 불행한 한 개인사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식민지 시기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부모의 딸로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네 살에 귀국했다. 이은 전쟁으로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다. 전쟁 통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그는 어린 난민이 되어 혼자 집에 돌아왔다. 그때 그를 살게 한 건 그의 엄마가 마당에 묻어 둔 김치와 찬장에 조금 남겨진 쌀이었다. “김치 덕에 계절이 세 번 지나도록 살아 있었어. 김치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그가 미국에서 끊임없이 김치를 담가먹었던 건 김치가 그의 몸과 영혼 모두를 살린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 돈이 도는 곳은 기지촌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남은 가족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으리라. 엄마는 그렇게 부산 기지촌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당시 선원이었던 나이 많은 아버지를 만나 미국에 도착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땅에서 그는 광인이 되고 말았다.      


조교수는 엄마의 조현병의 한 발원지로 셔헤일리스 그린힐 소년원을 주목하게 된다. 그가 조현병을 얻기 전 11년간 밤에 일했던 그곳에서 무수한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가 종종 혼잣말로 했던 “그린힐에 있는 나쁜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무수한 범죄의 현장을 목격했을지도, 범죄 가담이나 침묵을 강요당했을지도, 혹은 성폭력을 당했을 지도 모르는 경험은 “기지촌에서의 과거, 그리고 일본 식민주의 및 군사화된 성노예제와 얽힌 흐릿한 과거와 엉켜” 조현병 발발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측하게 했다.     


엄마의 조현병은 그를 은둔하게 만들었다. ‘오키’와 대화하며 종일 방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밖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김치와 밥으로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먹던 식사마저 거부하기에 이르자 조교수는 엄마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다. 엄마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한국 요리(장조림이나 나물 찹쌀떡 등)를 엄마의 지시대로 만들어 엄마와 함께 먹으며 모녀는 서서히 뭔가를 회복하고 있었다. 백미는 생태찌개였다. 할머니 식으로 끓인 생태찌개는 할머니와 고향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기도 놓아주기도 하는 치료제였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하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줌의 재로 남은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애도와 위로를 얻기 위해 조교수는 김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엄마는 미국에 와 버려져 광인이나 홈리스가 되어 도시를 떠돈 ‘전쟁신부’들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불행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고 애도하는데 실패한 한미 사회에 대한 정의 회복 프로젝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조교수의 프로젝트가 정체성을 부정당한 소수자가 가지는 감정(‘마이너 필링’)에서 발원했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로 간주되는 존재감마저 희박한 이들, 오직 흑인과 비교했을 때만 우등하다고 여겨지는 아시아인 그것도 한국인이 느끼는 빈약한 감정. 영화 <미나리>의 주인공들처럼 미국식 긍정심을 확인받거나, 백인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예절 바른 인종 서사를 발화할 때만 승인받는 ‘모범 소수자’라는 환영이 그에게로 어른댔었다.      


백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아 분명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전쟁신부’인 엄마의 이력은 그가 온전한 백인이 아니라는 꼬리표를 달게 했다. 총명한 그가 명문 브라운 대학을 진학함으로써 엄마의 한과 자신의 상처를 일정 정도 치유할 수 있었지만, ‘마이너 필링’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진함이 남았던 심리에 들이닥친 엄마가 ‘매춘부’였다는 ‘각성의 쇼크’는 엄마를 ‘사회적 죽음’으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 이 이야기를 반드시 백인 주류사회를 향해 발화하리라 결심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미시사를 통해 식민, 전쟁, 섹스를 동맹으로 한 한미 관계가 낳은 폭력의 유산을 적시하고, 거시사 속에 망각된 언어를 잃은 여자들의 개인적 삶과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기리고 보존해야 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성 전쟁의 논쟁사를 공부한다. 그에게는 중요한 화두였다. 성매매 여성의 성 노동자 주체성을 인정함으로써 하나의 마침표를 찍은 후, 박사논문 계획서(“‘Yankee whore(양갈보)로 번역되는 ’양공주‘라는 표상을 한인 디아스포라에 출몰하는 유령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를 제출했다. 


논문 계획 심사에서 그가 겪은 폄하와 모멸(정신병원에 가야 한다)은 제국주의 백인남성중심 사회 한 귀퉁이에 처박혀있는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시켰다. 이로부터 어언 10년 만에 소수 학자만이 읽는 논문이 아닌 대중서로 엄마에 관한 기록을 출간한 것은 “엄마(여성)가 겪은 광기와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을 발설하고야 말겠다는 그때의 결심을 결행한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잊히지 않기 위해.     

  

책 제목인 ‘전쟁 같은 맛’에 관해 궁금증이 생길 독자가 있을 텐데 직접 찾아보시라. 나는 ‘전쟁 같은 맛’을 증언하는 군자씨의 말을 듣다 문득, 전쟁을 몸서리치게 겪은 내 엄마에게도 ‘전쟁 같은 맛’이 있었을까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무 맛을 떠올렸다. 피난 중 하도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다 자라지도 않은 무를 뽑아 먹다 주인에게 발각돼 도둑년이라는 욕설과 함께 귀싸대기를 맞았던 얼얼한 맛. 열여섯 소녀에게 수치심과 억울함을 남긴 독한 맛. 어떤 ‘맛’은 통각이었다.  

    

* 이 글은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와 <마이너 필링즈>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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