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Nov 07. 2023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의 죄의식 VS 무죄

<단 한 사람> (최진영, 2023, 한겨레출판) 서평 에세이


요즘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때문에 기운이 났다. 드라마는 괴력의 DNA를 가진 모계 혈통 여자들이 위기의 사람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남순이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에서 문득 기쁘고도 슬픈 감각이 밀려왔다. 그날 ‘이태원’과 ‘세월호’에 남순이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다. 


희생자들에겐 영웅도 없었고 국가도 없었다. 어떤 죽음은 “겪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 목격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 기억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 일어났으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순은 슈퍼파워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을 구해야 한다면 어떨까. 게다 취약한 사람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정한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면, 이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만일 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신의 은총이 될까. 이때 구조 받지 못한 희생자에게 신은 차별을 지시한 자인가.      



소설가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을 읽고 한 주 내내 이런 복잡한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 늘 약자, 그것도 여자 특히 소녀의 고통에 천착했던 최진영은 왜 지금 ‘단 한 사람’만을 구하는 여자들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는 왜 ‘단 한 사람’을 구할 구조자로 모계 혈통가의 여자들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것도 자신의 권한이나 선택으로 정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아닌 신(나무)이 점지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 말이다. 게다 구하는 한 사람이 지극히 선량하거나 취약하거나 억압받은 자가 아닌, 그저 우연한 한 사람이기에 의문이 짙어졌다.      


나무(숲)을 통해 경고하는 인류의 위기,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절멸이다   

  

소설은 태고의 창세기를 짐작하게 하는 나무와 숲을 다루며 환상적으로 시작한다. 임천자의 딸인 장미수의 딸인 목화는 16살 어느 날 소환을 겪는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생경한 경험이어서 처음엔 악몽인가 환시인가 착각한다. 그러다 번번이 이루어지는 소환에 응하다 절망해 엄마 장미수에게 묻는다. 자신에게 닥친 환난과 고통이 대체 뭐냐고.      


미수는 고통의 연원이 모계에 흐르는 초월성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알린다. 피하려 했지만 무병처럼 엄습하는 고통이 더 끔찍해 소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나는 여자들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이 억울했다. 왜 무해한 여자들이 망가진 세상을 구하기까지 해야 하나. 


세상을 망가뜨린 데 인류의 반인 여자가 관여하지 않았다 공언할 수는 없지만, 지구를 위기로 몰고 간 과학의 선봉에 섰던 것은 남성 그것도 백인 남성이 아닌가? 자명한 가해 앞에 왜 16살 소녀가 ‘단 한 사람’을 구하고 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나무의 명령을 받는 목화. 목화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 한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목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목화는 왜 ‘단 한 사람’인가에 집착하지만 소환시키는 신(나무나 숲)을 대면하거나 추적할 수 없다. 


숲들이 웅얼거림으로 전달하는 것은 사람을 구하라는 명령, 이를 통해 사람을 구하는 일은 본래 위대한 영웅이 해온 일이 아니었고, 민초들의 삶을 구하는 영웅 같은 건 애초 없었으며, 우연히 소환의 운명을 타고난 목화 같은 보통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이 이어져 왔을 뿐임을 깨달으라 한다.  

    

소설은 인류의 위기를 깨달으라 초조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소멸해가는 나무들을 보라 한다. 캘리포니아 세콰이어 국립공원에 있는 삼천 년도 넘은 나무들이 불타 죽어가는 재앙을 통해 깨달으라 한다. 불타며 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들을 들으라 재촉한다. 이 불이 곧 너희를 삼킬 것이라 경고하지만 인간은 듣지 못한다.  

    

캘리포니아 숲뿐일까. “터키와 브라질, 러시아와 미국을 덮친 산불은 산림을 훼손하고 야생동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산림의 온실가스 흡수 기능을 처해하고 있습니다. 올해(2021) 산불 시즌은 그 어느 해보다도 전례 없이 독했지만 앞으로 더 길어지고 규모도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그린피스 인터내셔널 콘텐츠 에디터 메흐디 르만)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매우 큰 규모의 산불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집 80여 미터 전방에 얕고 작은 산이 있다. 산불 소식이 이어지면서부터 저 산이 불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곤 한다. 이 산 초입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꽤 굵은 메타세콰이어 예닐곱 그루가 도열해 있다. 아름답고 우뚝하다. 


그런데 올봄부터 세콰이어가 갈변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한숨만 쉬고 있는데 여기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서울 양재천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도 황화현상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말이다. 

     

나무(자연)들이 경고하는 징조는 한 과학자의 말처럼, 전문 지식이 없어도 이상한 징조만으로도 충분히 위기의 임박함을 알 수 있다. 모든 게 변했다. 나무들은 긴급 사이렌으로 재앙의 임박함을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지만 인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과학을 신의 자리에 앉히고 자연에 도전하고 해를 끼쳐 온 인간의 교만함과 미욱함이 임계점에 달했지만, 신(숲)은 그럼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하라 명령한다. 왜일까.  

   

신의 지명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목화가 찾아본 생존자들은 잘 살고 있기도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 목화가 살려낸 사람들 모두 선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들 모두 구조된 삶을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구조한 자와 구조된 자는 같은 삶의 맥락에 있을 수 없다. 


구조하는 자 목하는 “눈 깜박할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일”에서 ‘단 한 사람’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목도한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에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건넬 뿐이다.    

  


최진영의 소설 중 이번 <단 한 사람>이 가장 해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게 이런 운명이 닥친다면 나도 ‘단 한 사람’을 구할 것이란 예감이다. 그런데 구할 수 있는 능력과 마땅히 구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은 왜 ‘단 한 사람’도 구하지 않았는가.            

작가의 이전글 11년 엄마를 돌본 딸, '어머니를 몰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