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과 재생산권리②)
<나는 숨지 않는다> & <다른 듯 다르지 않은> &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를 통해 본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리
장애 여성이 연애의 난관을 뚫고 결혼에 이르더라도,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또 다른 허들에 직면하게 된다. 장애 여성은 “사랑은 축복해도 아이는 낳지 말라”는 주변의 저주를 감내해야 한다. 아이를 낳거나 말거나, 당사자 말고 누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저다지 무도한 폭언과 모욕을 던지는 걸까? 비장애 여성에겐 애를 낳지 않는다고 다그치고, 장애 여성에겐 아이를 낳는다고 야단인 세상,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장애 여성에게 감히 아이를 낳지 말라고 을러대는 폭력의 근저에는 정상성 즉 좋은 유전자에 대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 좋은 유전자 보유자만 재생산의 권리가 있다고 믿은 우생학의 주술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근대화를 추진하며 산업화의 역군이 되거나 제국주의를 확장할 군인의 몸이 되기 적합하지 않은 몸은 불필요한 몸으로 여겼다.
당연한 수순으로 유전성 질환, 한센병, 정신장애, 신체장애 등 우생의 견지에서 불량한 자손의 출생은 저지되었다. 일본의 우생보호법은 1996년까지 시행되며 수많은 강제 불임 피해자를 만들었다. 2022년 이 법으로 강제 불임수술을 당한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바 있다.
일본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 또한 이 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과 재생산권이 처참히 침해된 소록도 한센인 수용소가 그 증거다. 장애를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바라보고 이를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사고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뿌리 깊게 남아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을 무참히 짓밟는 도구가 되고 있다.
장애 여성의 임신과 출산 양육에는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아이를 낳는 무책임하고 무모한 존재라는 낙인이 끝없이 쫓아다닌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장애 여성만의 고난도 보람도 아니다. 양육자 누구에게나 닥치는 난관이지만, 장애 여성에게는 극복하지 못할 무엇이 되거나, 이를 무난히 이행할 때 “대단하다는 말”로 상찬되곤 한다. 비장애 여성의 재생산에 누가 비토를 하거나 대단한 성취하고 하는가.
책 <나는 숨지 않는다>에서 장애 여성 임경미는 “니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라는 주변의 비난을 물리치고 두 아이를 낳아 키웠다. 지체 장애인인 그는 “골반이 작으니까 아이가 하루하루 다르게 갈비뼈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살과 뼈가 분리되면서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른 것은 비장애 여성처럼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욕망도 유효했지만, 장애 여성인 자신의 “섹스, 결혼, 출산, 양육은 빼앗긴 주체성을 회복하고 긍정적 자기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사회적 분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장애 여성에게는 권리로조차 인식되지 않는 자연스런 행위가 장애 여성에게는 싸워 얻어야 하는 권리라는 차이는 우리 사회가 장애 여성을 어떻게 차별하고 있는지를 적시한다.
이런 차별은 어떤 경우 장애 여성에게 재생산권이 낙태권보다 더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게 한다. 장애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임을 강요당했던 엄혹한 시절을 지났어도 이들의 재생산권이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한, 재생산의 권리가 낙태권보다 우선될 수 있다. <헌치백>의 작가 이치가와 사오가 소설에서 임신하고 중절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은, 국가 멋대로 장애 여성의 임신을 막고 중절을 강요한 재생산권 침탈에 대한 역설 가득한 앙갚음이지 않겠는가.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 그리고 재생산권을 다룬 임해영의 <다른 듯 다르지 않은>에는 많은 장애 여성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장애 여성이라고 장애를 똑같이 겪는 것이 아니며, 장애 여성도 비장애 여성과 현격히 다르지 않은 성과 사랑과 재생산의 경로를 겪는다는 점에서,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장애 여성의 경험을 여러 인터뷰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장애 여성은 장애 종류와 정도에 따라 겪는 어려움이 달랐다. 장애 남성과 교제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장애 여성이 있는가 하면, 비장애 남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장애 여성도 있다. 비장애 남성과의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정상성으로의 편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지만, 비장애 남성 가족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움을 헤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임신과 출산에 돌입할 때, 장애 여성들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장애 여성의 몸에 대한 지식이 충분한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산부인과 의료 또한 정상성에 근거해 비장애 여성 위주로 형성된 학문이기 때문에, 장애 여성의 몸에 대한 연구나 실제 의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본 여성이라면 알 수 있을 경험인데, 산부인과 진료 시 걸터앉아야 하는 진료 의자는 비장애 여성이 앉기에도 힘들다. 하물며 몸이 다르고 불편한 지체 장애 여성이 어떻게 그런 의자에 앉겠는가.
김지우(나는 그의 ‘굴러라 구르님’ 유투브 채널의 구독자인데, 그는 뇌성마비 지체 장애인이다)의 장애 여성 인터뷰 기록인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에는 지체장애 여성 다은의 임신 출산 경험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장애 여성에 대한 산부인과 의료의 무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좋은 산부인과 의사를 만날 경우, 임신 출산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일 큰 타이틀이 엄마”라는 지체 장애여성 다은의 재생산에 난관이야 없었겠는가마는, 장애를 불능이 아니라 불편함으로 인식하는 그에겐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도는 영업직원이었는데, 휠체어를 탄다는 외 전국을 떠도는 엄마의 양육이 장애 여성만의 어려움이겠는가.
출산 후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장애 여성을 지원할 보조 인력은 중요하고 절실하다. 때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장애 엄마와 돌봄 제공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에, 돌봄 서비스 제공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비장애 여성처럼 뭐든 해낼 수 없으니, 장애 엄마로서 고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양육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가사노동의 버거움, 활동 지원사의 지속성 및 좋은 관계 유지 등,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다고 비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을 억압하지는 않는다. 저출산 운운하며 온갖 걱정만 늘어놓고 돈으로만 싸 바르려는 정책에 골몰하는 대신, 아이를 낳아 키우려는 장애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적극적으로 조력할 방안을 내놓으라. 출산장려정책에서 장애 여성을 소외시키는 사악한 차별 정책을 바로잡고, 장애 여성 친화적인 산부인과를 육성하고, 장애 유형별 정도별 양육 체계를 구축하라.
아이 낳아 기르겠다는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이 단 한 번이라도 저출산 정책 운운에 등장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안 낳겠다는 여성들 족치지 말고 낳겠다는 장애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 결론으로 명토 박자면, 유명무실한 대통령 직속 저출산 위원회 만들어 반전 꾀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및 정무 및 당직자들은 정신 좀 차리고,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 그리고 재생산권에 일도 도와주는 것도 없이 무슨 권한이라도 있는 양 가타부타 하는 자들은 그 입을 다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