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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12. 2024

글을 읽는데 무지개를 보고 치킨 너깃 맛을 느낀다면?

<읽지 못하는 사람들> (매슈 루버리, 2024, 더퀘스트) 서평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독서다.” 독서광이었던 올리버 색스가 한 말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뭔가 찜찜한 나로서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읽기와 나의 읽기가 동일한 경험인지는 모르겠다.      


읽기는 무엇일까? 독서관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만, 대부분은 문해력을 전제한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읽기란 각자의 관점으로 책을 해석하는 것일 텐데, 이해, 공감, 자각, 비판, 탐구, 성찰 등을 통해 다른 단계의 인식으로 도약하기도 한다. 이른바 자기계발 혹은 성장을 꾀하는 것인데, 보통 이를 책의 으뜸가는 순기능으로 친다.      


그런데 이런 기능과 무관한 읽기를 하는 독자가 있다. 당신은 이런 독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장애인을 만나기 어렵듯이 이런 독자를 만나기 어렵기에, 우리는 우리의 읽기 방식이 모두에게 여일하게 일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매슈 루버리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다양하고 독특한 신경다양성 독자를 알게 된다면, 우리의 읽기가 자연스러운 천성이 아니라 “문화가 발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토록 다양한 책 읽기의 세계가 있다니    

 

책 제목의 ‘읽지 못하는’은 보통의 독자가 바라보는 관점을 내포한 것으로 저자의 역설적 의도를 담고 있다. 오히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는 이 책의 목적은 “읽기를 낯설게 만드는 것”으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 누구의 방식에서 그러한가를 되묻게 한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단일한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읽기가 매우 다채로운 현상이며 그렇기에 읽기를 더 넓게 정의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한다. 저자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완독 후 나의 읽기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다채로운 읽기란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람의 읽기 방식을 통해 제시된다.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실어증과 다르다), 공감각, 환각, 치매 등을 겪는 독자는 보통의 독자가 읽는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    

  

난독증은 “시각 정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기호를 소리로 잘못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증상이다. 지금은 비교적 많이 알려졌지만, 난독증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 ‘단어맹’ ‘정신맹’등으로 불리며, 잘못된 교육, 열악한 가정환경, 게으름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어 사회로부터 차별과 낙인을 당했다. 지능이 모자라거나 노력하지 않아 못 읽는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읽지 못하는 증상을 속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전혀 책을 읽지 않을까? 아니다. 난독증 환자였던 필립 슐츠는 <난독증 일기>에서 “실제로 읽는 것만 빼면 책의 모든 부분을 좋아한다”고 했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읽을 뿐이다.      


신경다양성 읽기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콘텐츠 중 <레인맨>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다. 영화 주인공은 1951년에 난산으로 뇌 손상을 입고 태어난 픽이라는 남자를 실제 모델로 삼았다. 그는 뭐든 읽고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하는 과독증 독자로 일면 기억력 천재지만, 읽은 것을 기억할 뿐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읽기를 무척 좋아하고 멈추지 않는다. 책의 물성에 매혹당하고, “글자는 사람처럼 변하지 않기에” 책으로부터 만족감과 안정감과 위안을 얻는다. 과독증 독자가 느끼는 ‘만족감, 안정감, 위안’은 내가 책을 통해서도 느끼는 주된 감정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책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읽기를 ‘읽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실독증은 어떨까? 이는 뇌 손상을 입어 더는 읽을 수 없게 된 증상이다. 뇌졸중, 종양, 머리 손상, 퇴행성 질환 등,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될 수 있는 증상이다. 선천적이 아니기 때문에  문해적 읽기를 해왔던 읽기 당사자로서는 상당한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증상이 가장 무겁게 다가왔다.      



<어는 멋진 아침>이라는 영화에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퇴행성 질환을 앓으며 인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철학 교수였고 비판적 읽기와 첨예한 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갑자기 찾아온 병은 그의 읽기 능력을 앗아갔다. 벼리고 벼린 언어로 사유의 세계를 펼쳐냈던 뛰어난 철학자가 아기가 되어버렸다.

      

읽기 능력뿐이겠는가. 인간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활동을 망각해 간다. 기본적인 생활 활동도 못하는데 읽지 못하는 것이 대수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의 읽기 능력 상실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아마도 읽는 것을 삶의 가장 주된 활동으로 삼아온 나로서는 읽지 못함을 곧 삶의 상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테다.      


물론 모든 실독증 독자가 영화 속 퇴행성 질환을 겪는 인물처럼 무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실독증은 “읽을 수는 없지만 보거나 말하거나 다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신경학적 증후군이다.” 읽기와 연관이 깊은 일을 하는 실독증자는 큰 위기에 봉착하겠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며, 읽기와 연관 없는 일을 찾아 전업해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후천적으로 읽기 능력을 상실한다면, 한동안 ‘특권’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바보가 되었다”는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오디오북이 있고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기술이 발달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밖에도 글자에서 색을 느끼거나 맛을 느끼는 공감각 독자도 있다. 이들은 읽으며 “대화를 읽거나 들을 때 내 몸에서 색이 흘러나온다”거나 “글자에서 치킨 너깃 맛”을 느낀다. 유사 공감각은 “글자에서 성별, 신체적, 성격적 특성, 정신 상태, 인지 능력, 사회적 관계, 직업, 관심사 등을 보거나 느낀다.” 정말 놀랍다. 읽기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경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니 말이다.    

  

다시 처음의 화두로 돌아와 보면 읽기란 매우 다채로운 현상임을 깨닫게 된다. 문해를 읽기의 목적으로 삼아 온 다수의 독자에겐 책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는 신경다양성 읽기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들의 독특한 읽기를 다수의 권력으로 읽기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앞서, 우리는 신경다양성이 장애가 아니라 개인의 고유한 특성임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면 어떻겠는가. 책을 통해 풍부한 감각과 인지를 경험한다면 왜 읽기가 아니겠는가? 디지털에 중독되어 감각도 지각도 둔탁해지며 문해적 책 읽기 능력마저 상실해가는 사람들이 가타부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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