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론 하워드 감독, 2020, 미국) 리뷰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 이후 미 대선의 판도가 달라졌단다. 내 나라 정치 상황도 한숨 나는 판에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야 관심이 가겠는가마는, 트럼프 후보의 부통령으로 지목된 J.D. 밴스 연방 상원의원이 영화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이라며 ‘흙수저’ 프레임으로 회자되자, 문득 예전에 봤던 이 영화가 생각났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가 왜 잃어버린 백인 남성성을 부활시킬 총아로 떠오른 건지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본 내 느낌은 주인공 밴스가 수박 겉만 열심히 핥았다는 인상이었다. “상처도 소중한 유산”이라는 영화평에 동의하지만, 상처를 입고도 극복한 것이 오로지 그의 영광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불행이 마치 엄마 때문이라는 인상을 준 서사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영화 속 약물 중독인 밴스의 엄마 베브가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약물 중독인 베브 또한 척박한 환경의 결과라는 점에서, 유죄를 그에게만 돌리는 건 부당하다.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역시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백인 남자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딸 베브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둘 곳이 없었던 베브가 어리석은 결혼으로 가난하고 외로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어디 그의 잘못만이겠는가. 그럼에도 상처의 도미노에 갇힌 이 여자들에게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한다면, 나는 그의 손가락을 물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완벽하지는 못했지만(완벽한 엄마 같은 것은 없다), 가난과 질병과 폭력 속에서도 아이 돌봄을 내팽개친 적이 없었다.
베브는 잘 살고 싶었다. 좋은 남자 만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책임감 있는 남편과 행복한 결혼은 유토피아였다. 여러 차례 결혼 실패로 정착하지 못하다, 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마약성 진통제에 손을 대게 되면서 중독되고 만다. 더 이상 아들 밴스를 감당할 수 없자 할머니에게 보낸다.
밴스가 할머니에게 보내지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쉽게 베브를 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베브가 어린 밴스를 키우느라 홀로 고군분투할 동안 밴스의 아버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엄마 베브의 미달된 모성은 할머니를 통해 달성된다. 가난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처지에 손자를 맡았으니 할머니의 고충이 어떻겠는가. 하지만 할머니는 딸 베브가 충족시키지 못한 모성을 완성시키기에 충분히 강인한 사람이었다. 얻은 음식으로라도 밴스를 걷어 먹이고, 손자가 가난에 지지 않게 채찍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성인이 되어 예일대 법대에 들어간다.
할머니의 사랑은 숭고하다. 하지만 이는 곤궁한 살림살이와 이어지는 남편 폭력 속에서 딸 베브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함에 대한 뒷감당인 셈이고,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엄마에게 부과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젠더 부정의를 내포하고 있다.
할머니의 양육 고충과 이를 타개하려는 노력이 아름다운 모성애로 미화되기 앞서,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는 동안 전무한 양육 복지와 약물 중독 엄마가 치료를 받을 동안 아이 돌봄에 생기는 큰 공백에 아무 대책 없는 사회의 무관심과 무책임이 먼저 성찰되어야 한다.
영화는 ‘슈퍼파워 아메리카’에 가난한 (백인) 국민이라는 역설적 현실을 사려 깊게 짚어야 했지만, 시종일관 고난에도 손자를 북돋우는 할머니의 모성과 역경에도 기어이 예일대에 진학한 밴스의 헝그리 정신만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비틀린 ‘아메리칸드림’은 밴스에게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잇 어게인’(Make America Great Again)의 신화를 계승할 ‘개천용’의 자리를 내주었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가 오하이오 출신이라는 이유로 러스트 벨트를 복구할 인물로 추켜세워지는 현상이다. 그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러스트 벨트의 몰락 때문인가. 러스트 벨트의 대대적 실업이 그의 불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전부는 아니다. 문제는 실업을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무책임과, 가난한 여자들이 아이를 키우는 데 어떤 조력도 하지 않은 사회의 악덕이다.
밴스의 어릴 적 곤경은 러스트 벨트 백인 노동자의 몰락으로 단순화될 수 없으며, 그를 이렇게 재현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힐빌리의 곤경’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밴스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되기 전 그는 트럼프를 비판해왔지만,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꿨다.
그는 트럼프의 공약인 불법 이민 차단을 내세우며 이민자가 없다면 백인이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대부분은 불법 혹은 미등록 이주민이 아니라, 미국 고용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공적으로 공급된 이주민이 대부분이다
또한 미국만 살리겠다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우선주의는 자국의 이익과 고용을 위해 모든 공장이 미국에 세워져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모든 제조 공장이 미국으로 이동하느라 고용이 말라버린 기업 당사 국가는 어쩌라는 것인가.
이미 한국 이차전지 기업 등도 각종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미국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을 세우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 세워졌다면 얼마나 많은 고용이 창출되었을지 분통이 터진다. 추락한 백인 우월성을 추어올리고 러스트 벨트를 없애기 위해 다른 나라에 러스트 벨트를 이식시키고, ‘힐빌리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 밴스에게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엄마 돌봄의 회피였다. 약물 중독으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엄마를 지킨 것은 역경 극복 신화의 주인공 밴스가 아니라 그의 누나였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원망했던 것만큼도, 복지 부재의 각자도생 디스토피아 미국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원한을 품지 않은 밴스의 인지 왜곡은 엄마 돌봄을 누나에게 전적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여자인 누나에겐 할머니에게 돌봐지는 가난한 특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풀타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엄마를 돌봐왔고, 이에 지쳐가면서도 동생 밴스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밴스가 ‘흙수저’로 성공했다면, 이는 그의 ‘노오력’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여자들의 보살핌 때문이었다.
돌봄은 언제나 그림자 노동이었다. 밴스뿐 아니라 대부분 남자들이 누리는 성공은 여성들의 무급 돌봄 노동에 무임승차한 덕분이다. ‘힐빌리의 노래’가 백인 남성 밴스의 성공 신화가 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