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 2024) 리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볼 생각은 없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는데, 홀로코스트 영화여서인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가한 폭력에 관해 가타부타 할 거리가 있겠는가마는, 피해자가 더 가혹한 가해자가 된 판에 저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즐겨듣는 팥빵에서 가해자의 일상을 보고 뭘 생각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접하자 불쑥 관람 충동이 일었다.
시종일관 이렇게 역겨운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영화는 참담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악의 평범성’이 욕기를 일으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악에 대한 생각과 판단 없음이 만연한 공동체는 악을 저지르고 시켜서 했다며 면죄부를 얻고자 한다.
점차 만성이 되면, 하라는 대로 했지만 뭔가 찜찜한 죄의식조차 사라지면서 악에 대해 자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복무하게 된다. 이러한 탈윤리적 인간들에게는 드라마 <모범택시>의 주인공 김도기가 던진 명대사가 제격이다. “이것들은 시켜서 한 거면 죄가 없는 줄 알아.”
이 영화에 관한 가해자의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보고 뭘 생각해야 하냐는 불평에 대해, 내 대답은 생각할 거 많다다. 물론 옆에 있었다면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가해자들의 만행이야 역겨움의 최대치지만, 목하 우리 사회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으스스하고, 정말 이상한(creepy and just weird as hell)” 징후에 대해 이 영화가 함의하는 바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함의를 다루기 위해, 이 영화와 배경이 매우 비슷했던 다른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언급해 보겠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 역시 아우슈비치이고 이를 관리하는 나치 장교와 그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눈치 빠른 독자가 이미 짐작하듯 ‘줄무늬 파자마’란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들이 입는 복장이다. 이 영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다른 점은 가족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몹시 괴로워한다는 점이다. 극적인 대조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 속 가족이 표출하는 죄의식에 대해 썩 공감이 되지 않았다. 정말 그랬을까. 물론 나치 치하의 모든 독일인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이 독일 국민의 압도적 지지에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당시 독일 사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히틀러라는 광인이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나 유대인 절멸이라는 제노사이드를 자행한 게 아니라, 광신도 집단과도 같은 독일 국민들의 찬양과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후안무치한 전쟁 책임회피를 지적할 때 종종 독일인의 반성을 예시하곤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히틀러 광신도 집단이 집단 최면에서라도 깨어나듯이 벼락처럼 성찰이 찾아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전쟁 책임 문제와 홀로코스트에 관해 오랜 시간 독일 사회 내부의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을 거치고서야 폴란드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독일 총리가 나올 수 있었다. 국가가 하라는 대로 했다는 책임의 면피는 국가의 지시가 곧 정언명령이라는 망상을 지속적으로 주조해 내며 옳지 않은 일을 꾸역꾸역해야 할 때 터져 나오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잠재우게 했다. 유대인 절멸은 유대인은 죽어도 된다고 믿은 절대다수의 부역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슈비츠 근처의 나치 장교 가족들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가까웠을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 가까웠을지 크게 고민할 여지는 없다. 거창한 인류애는 제쳐주고라도 내가 사는 평화로운 담장 바로 뒤에서 단지 어떤 인종이라는 이유로 하루 수백 명을 태워 죽이는데도 국가가 용인했기에 이를 당연시한 채 자신들의 초록 정원에서 웃고 떠들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역겹고 공포스런 군상이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영화 속 루돌프 회스 중령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죽일까를 고민하다, “태우고 식히고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며 쉴 새 없이 가동되는 화로를 고안하고 작동시켜 “독일의 개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나치 장교의 가족들은 유대인의 유품이 될 소지품을 자신의 전리품인 양 거두어 쓸만한 것을 입고 먹고 쓰며 어떤 께름함도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돈 되는 물품을 포획해 부를 늘릴 것인가만이 초미의 관심사다.
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는 히틀러의 명을 수행하고 있으니, 초록 마당 뒤로 보이는 굴뚝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태우는 연기가 뿜어져 나와도 담장 너머의 지옥은 자신과 상관없다. 수용소에서 창출되는 이익으로 17살부터 꿈꾸어온 낙원 같은 집과 가족을 일구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믿는다.
유대인 여성을 하녀로 부리며 언제든 “아무도 모르게 재로 만들 수 있다”는 압제자의 권력에 도취되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득 전쟁에서 패하고 히틀러가 죽고 그렇게 소중하게 가꾸어온 자신들의 영지를 떠나게 되었을 때, 모든 게 자기 것이 아니었지만 자기 것이라 믿은 가해자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짐짝처럼 수송 열차에 실리던 피해자들보다 더 억울한 표정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역설을 경우해 도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그토록 핍박받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저토록 포악한 광신도 집단이 되어 자신들이 겪은 절멸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고 있느냐 말이다. 또한 유대인이 절멸되는 과정에 부역한 유럽 국가들은 홀로코스트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골몰하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조력했다.
그리고 그 일방적 정치적 결정의 책임을 지금 3만이 넘는 민간인(주로 아이와 여성)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음으로 대속하게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에게 학살을 멈추라고 호통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에서건,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서건, 세계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지만,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는 탈역사화되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학살의 피해자가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의 피해자로 인정받는 순간, 가해와 피해의 교차성을 버리고 피해자 정체성만 남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순수한 피해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