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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Sep 04. 2024

글, 멜로디, 이미지... 아, 훔치고 싶은 유혹이여!

<옐로페이스> (R.F. 쿠앙, 2024, 문학사상) 서평 에세이


페이지는 잘 넘어갔다. 그래도 좀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전을 빈번히 쓰지 말고 한 100페이지쯤 줄였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옐로페이스>를 읽다 든 생각이다. 작가적 능력은 인정, 그럼에도 할 말만 딱 쓰고도 재미와 감동을 다 잡는 클레어 키건 스타일은 참고할 만하다.   

   

<옐로페이스>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 R.F. 쿠앙의 소설이다. 예상과 달리 주인공은 백인 여성이다. 그것도 중국계 미국인 친구의 재능과 팬덤을 질투하는 백인 여성이라는 점이 독특했다.      


중국계 작가라는 정체성을 부러워한다는 설정은, 비록 소수일지라고 아시아계 미국 여성 작가의 출판계 내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거나, 백인 여성 작가를 경유해 출판계 내 아시아계 여성들의 치열한 경쟁과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속 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소설은 글쓰기에 관한 치열한 욕망을 그리는 동시에, 누가 글의 온전한 주인인지와 작가의 문화적 유산의 소유권을 질문한다.      



이를테면,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 C 팸. 장이 미국 서부 골든 러시 시대에 황금 광산 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너 온 중국인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의 역사를 소설로 다룰 때, 그가 다루고자 하는 중국인 디아스포라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인종 정체성으로 이해되고 공감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작가가 누리게 되는 마땅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인정은 그가 중국계라는 문화적 유산에 상당히 빚지게 되는 셈이다.   https://brunch.co.kr/@jupra1/258 

  

이때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작가적 성공을 거두게 하지만, <마이너필링즈>의 저자 캐시 박 홍의 비판처럼, “인종 정체성의 순수성을 가정, 인종 정체성을 지적 재산권으로 전락시킬”수도 있다. 유색인종 작가로서 백인성을 탈 중심화하는 글쓰기에 무수히 도전하지만, 결국 백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는 선을 지킨 작품만이 출판계의 러브 콜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인 이민자의 후손인 정이삭이 부모의 디아스포라를 다룬 영화 <미나리>가 미국 내 큰 호감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백인 여성이 중국계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면 소설의 진가를 평가하는데 편견이 작용할 수 있다. 주인공과 디아스포라를 대상화하지 않는 당사자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정체성 논란은 발화자의 자격을 묻는 문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옐로페이스>는 소설에 이 논쟁을 개입시키면서, 백인 여성이 잘나가는 중국계 여성 친구의 초고를 훔쳐 대담하게도 재구성한 소설이 그의 주장처럼 그의 것이냐는 표절의 문제를 질문한다.    

  


표절 논쟁은 동서를 막론하고 빈번하다. 한국도 심각하다. '김건희 논문 표절'은 표절 여부를 따지기도 뭐할 만큼 ‘붙복’으로 논문 표절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내게 잊지못할 표절 논란은 ‘신경숙 표절 사건’이다.   

   

그때 그의 해명?이 좀 구차했는데,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다는 그의 변과 달리 미시마 유키오 <우국>의 한 문단은 명백히 유사했다. 자신이 쓴 문장이 날라가 다시 쓰려고 해도 절대 똑같이 써지지 않는 경험을 해 본 이라면 누구나 그의 주장이 딱할 만큼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당시 표절도 문제였지만, 그가 깨끗이 인정하고 한동안 숙려하면 됐을 사건을 소위 ‘문단 권력’이라 불리는 문단 내 카르텔이 그를 옹호하면서 문단과 출판계의 적폐가 고스란히 드러나 일파만파가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미상의 소설 <이중작가 초롱>이 세밀하게 다루듯, 서로의 경험과 대화가 도난당하듯 소설에 차용되기도 한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작가들은 표절 방지를 위해 절대 작품 구상을 공유하지 않는단다. 합평 모임이나 대화로 다루었던 소재나 아이디어가 표절되는 사건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실제로 얼마 전에도 일어나 떠들썩했고, <옐로페이스>에서도 재연된다.    

  


소설의 주인공 백인 여성 주니퍼 헤이워드는 중국계 친구 아테나 리우의 소설 초고를 훔친다. 훔친 초고를 갈고닦아 출판계의 문을 두드리고 뜨거운 반응을 받는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러나 아테나는 지금껏 줄곧 누려왔던 대우였다. 자신을 대접하는 출판계의 태도가 공손할수록 주니퍼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필명마저 주니퍼 헤이워드에서 주니퍼 송으로 부르며 정체성을 중국인으로 염색한다.    

  

“이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는 내 것이 아닐지 몰라도, 이 소설을 부활시킨 사람, 거친 원석을 다듬어 다이아몬드로 만든 사람은 나였다”고 자기 확신을 강화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다만 초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그것도 초고의 주인이 유명을 달리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져왔다는 것은, 소설의 저작권이 누구의 것인가를 넘어선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탄생한 첫 소설의 반응은 SNS에서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고 이러한 논쟁은 주니퍼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이즈 마케팅으로 소설의 판매량을 증가시킨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일약 스타 덤에 올랐으나 이도 잠시, 차기 소설에 대한 재촉은 그를 첫 소설의 성공에 심취하도록 두지 않는다. 신간에 대한 압박감으로 아테나의 메모를 다시 기웃대고, 이에 영감을 받아 써낸 신간은 재차 표절 논란에 휩싸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짜증 나는 사건들은 독자의 손에 한 권의 책이 들어오기까지 어떤 비가시화된 과정이 출판에 개입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이에나 같은 출판계에 처한 작가의 위치와 작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인종차별, 인기 작가와 비인기 작가의 비교 불가한 출판계의 차별 대우,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살벌한 판에 등장한 SNS라는 전에 없던 신종 무기가 어떻게 한 작가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지 생생하게 드러낸다.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영웅으로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마녀, 배신자, 루저로 한순간에 강등시키는 대중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 말이다.  

    

두 권의 소설이 모두 친구 아테나의 유산이라는 것이 들통나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주니퍼,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는 법인가. 그는 아테나가 팬덤에 오른 소설들이 타인의 삶을 통째로 표절했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인기를 끌었던 한 소설은 그가 아테나를 믿고 고백한 강간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도둑질이었어.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 사람들의 고통을 마음대로 갖다 썼어. 나 못지않게 훔쳤다고. 나한테서도 훔쳤고...” 주니퍼가 재기의 수단으로 비장하게 고안한 소재는 유사 자서전으로 아테나 죽이기 폭로가 될 예정이다. 


단 한 번도 명품 소설을 써야 한다는 소망을 품어본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병적인 집착과 열망이다. 그럼에도 글쓰기가 자신의 정제성이고, 살아갈 이유이고, 세상의 전부라는 데서 한껏 비판하기가 망설여진다. 표창처럼 날아드는 세간의 비난을 맞고 피 흘리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고 살아남으려는 여성 작가의 자기애적 글쓰기가 짠하다.      



표절은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다. 하지만 표절의 경계를 정확히 구획 짓는 일은 얼마나 아득한 일인가. 세상에 온전히 나만의 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자각의 지점에서 고민은 더 깊어진다. 인간 문명 모두는 언어로 매개되었고 인류는 그 강력한 자장 안에 있다. 나만의 유일한 언어가 없다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의식적 무의식적 표절로 미끄러지는 욕망을 다스리는 윤리적 글쓰기가 요구될 뿐이다. 게다 지금 인류는 인간뿐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는 가공할 표절 도구를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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