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드라마 <파인: 촌뜨기들> 리뷰
신안 앞바다에 침몰된 보물선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제법 된다. 이 중 최근에 극화된 디즈니+ 드라마 <파인: 촌뜨기들>이 발군인 듯하다. 드라마는 1977년경 ‘그륵’으로 불리는 보물을 두고 극 중 인물들이 벌이는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이전투구를 다룬다. 제법 많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캐릭터를 개성 있게 그려내 흥미로웠다.
게다 보물을 탐내며 모여든 인물들이 충청, 전라, 경상, 서울 출신으로 대한민국 전국구를 망라하면서, 이들이 정신없이 쏟아내는 방언과 찰진 욕설들이 징글징글하면서도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징한 인간 군상 중 ‘다방 레지’ 선자(김민)와 흥백산업 사모님인 정숙(임수정)에게 특별히 관심이 갔는데, 이를 얘기해 볼까 한다.
<파인: 촌뜨기들>을 같이 시청한 딸애는 이 드라마를 이미 웹툰으로 봤다면서, 웹툰의 인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악스러워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드라마는 상당히 순화된 듯하다며 원작보다 나은 드라마로 보기 드문 경우라고 평했다. 특히 ‘다방 레지’로 나오는 선자와 흥백산업 사모 정숙의 변모된 캐릭터도 마음에 든다는 말도 함께 내놨다. 나는 반반이다.
선자는 성매매로 유입되는 여성의 슬픈 각본처럼 할머니 병 치료 때문에 빚을 지고 다방에 팔렸다. 다방에서 차를 파는 것은 물론이고 ‘티켓’을 끊어 매상을 올려야 준 노예 상태인 ‘레지’에서 벗어나지만, 빚은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갚을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그때 서울에서 왔다는 희동(양세종)은 그녀가 꿈꾸던 도시 서울로의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희동을 잡기 위해 술수를 부리지만 희동의 삼촌 관석(류승룡)에게 덜미가 잡힌다. 이 과정에서 선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성매매 여성들이 당연한 듯 감내해야 하는 심각한 인권침해지만, 오히려 선자에게 반성의 재료로 전환된다. 거짓말이 들통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착한 선자는 희동을 찾아 나서고 그를 위기에서 구하게 되면서, 그녀의 타락한 죄, 거짓을 고한 죄는 사함을 받는 듯하다. 이는 꽤 익숙한 서사인데, 7, 80년대 영화계를 구가했던 ‘호스티스 서사’와 닮아 있다.
‘호스티스 서사’는 그녀들이 어떤 구조적 폭력으로 성 산업에 유입되었는지, 그럼에도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그녀들의 의지나 주체성은 흐릿하게 다룬다. 땀 흘리는 노동이 싫은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이 성 산업에 진입했다는 전제 아래, 그녀들은 타락한 죄를 씻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방편으로 제시되는 길은, 훌륭하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잘난 남자를 번듯하게 뒷바라지해 입신양명시키거나(이때 여자는 남자를 성공시키고 그의 안녕을 위해 떠나야 한다), 비록 죄인이기는 해도 때 묻지 않은 청순함과 선량함을 가지고 있어 이를 발견한 눈 밝은 착한 남자에게 구원되어 갱생된다는 식이다. 뭐가 됐든 가부장을 수호하기 위해 성매매 여성이 도구화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선자의 구원자로 보이는 희동은 어떤 인물인가. 극 중에서는 그나마 촌뜨기 악당들 중 좀 덜 나쁜 놈으로 나오지만, 어려서부터 도둑질로 이력이 났고 성장해서는 주먹 꽤나 쓰고 다니는 급을 좀 키운 도둑이자 사기꾼이다. 이런 밑바닥 인생인 희동은 그러나 어쩐지 속정 깊은 인간애를 가지고 있다고 상정되면서, 자신을 속이려 했던 선자를 가엽게 여기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물론 선자는 구원의 대상이 될 조건을 구비했다. 성적으로 방종해서가 아니라 효심으로 희생되어 성매매 여성이 되었고, 비록 거짓말은 했지만 깊이 뉘우칠 줄 알고 이를 고백해 용서를 구하려는 가상한 선량함이 있고, 남자의 귀한 목숨을 구하는 의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은 되어야 전혀 신뢰할 만한 사회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범죄자 남자에게라도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드라마가 선자의 캐릭터에게 꿈을 좇는 주체적인 서사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구태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또 한 명의 이색적인 인물 흥백산업 사모 정숙을 보자. 그녀는 전 남편의 실종 후 재혼해 흥백산업의 ‘안사람’이 되었다. 드라마는 한때 흥백산업의 경리직원이었던 그녀가 ‘안사람’이 되기까지 어떤 곡절이 있었을까는 상상하라고 한다. 남편 천사장(장광)에게 젊은 미모로 낙점되었을 수도, 그녀가 삶의 방편이자 재무전략으로 천 사장을 선택했을 수도, 아니면 정숙과 천 사장이 서로의 필요를 충족했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손가락질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선택이자 거래지만, 이런 경우 젊은 여성은 남편을 후린 여자로 ‘꽃뱀화’된다. “근본도 없는 것”이라는 세간의 빈축을 모를 리 없는 정숙은 이를 갈며 재주껏 부를 축적해 나간다. 이때 그녀에게 ‘성 상납’ 제물로 나타난 희동이라는 청년과 큰돈이 될 ‘그륵’의 출현은 정숙의 양가적 욕망을 부추기며 내달리게 만든다.
늙은 남편에게 성적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정숙이 조공된 제물을 기꺼이 취하고 즐기려는 욕망은 분명 비윤리적인 성거래지만, 권력 있는 남성에게 자연화된 성 상납이 전격적으로 미러링되는 상황은 묘한 긴장과 쾌감을 준다. 남편의 전방위적 감시를 은밀하게 따돌리고 욕망을 채우는 정숙은 음탕녀이거나 악녀인가?
이는 집 파티에 접대 여성으로 고용된 성매매 여성 중 가장 이쁜 여자를 남편 옆에 앉혀 시중들게 하는 대담함으로 통 큰 사모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기울어진 성적 권력관계를 드러낸다. 남편의 욕망은 비록 늙었더라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지만, 젊은 여자인 아내의 욕망은 가부장의 시선으로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유구한 성적 권력관계 말이다.
성적이든 재물이든 출렁거리는 욕망을 요령껏 채우는 정숙은 그러나 위기를 맞는다. 남편의 금고에서 발견된 애틋한 전 부인에 대한 애정과 애도가 녹아있는 손글씨 편지는 지금껏 자신이 그저 경리로 이용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했다는 분심을 품게 하고, 임원들의 무시와 조롱 그리고 ‘그륵’을 독식하고 싶은 욕망까지 가세해 그녀를 도발하게 부추긴다. 하지만 남편 죽인 악녀가 되어 흥백산업을 삼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가차 없는 청부살인의 제물이 될 모양새다.
착한 성매매 여성 선자와 악한? 사모님 정숙은 가부장의 시선에 의해 이분되어 분할된 너무나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착한 여자는 구원받고 악한 여자는 모든 것을 뺏기고 추방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드라마는 정숙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시청자에게 결말을 단정하려 하지 않지만, 가장 친하다고 여기는 친구에게 배신당한 정숙이 과연 이 위기에서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기대하고 싶다. 혹시 시즌 2가 만들어진다면 더욱 교활하고 전략적이고 매혹적인 욕망 덩어리가 되어 과감하게 세상의 뒤통수를 때리는 거물 캐릭터로 등장했으면 좋겠다. 악녀?는 가부장의 네이밍이다. 간택 받으려 종종대는 선자의 지고지순보다 간택하는 정숙의 요망한 에너지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