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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르게 낭만화한 ‘버스 안내양’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 리뷰

by 그냥


드라마 <백번의 추억>, 4회까지는 흥미로웠다. 버스 안내양의 삶을 중심으로 조명한 드라마가 없었던 터라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현재가 아니라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인 1982년에 쓰여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부한 서사를 전개했다.


그만 볼까를 여러 차례 고민하다 끝까지 시청한 것은, 거의 곡예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원 버스에 매달려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용감한 그녀들을 배반하고 싶지 않아서다. 작은 몸으로 승객들을 밀어 넣고 채 닫히지도 않은 버스를 발차시키며 ‘오라이’를 외치던 그녀들의 노고에 그때 전하지 못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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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세대는 이 드라마를 보며 저마다 버스 안내양을 추억했을 것이다. 나는 개문발차로 버스 문에 매달려 가던 그녀들의 어마어마하던 강단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러쉬아워가 아닌 한가한 시간엔 손에 든 작은 수첩을 열중해 들여다보거나, 고단해 졸다 머리를 지찌던 그녀들이 생각났다. 남편은 ‘회수권(버스표) 삥땅(회수권을 교묘하게 잘라 10장을 11장이나 12장으로 늘리는 속임수)’을 추억했다.


하지만 대중의 추억은 일방의 향수일 테고, 그녀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진지하게 돌아본 이가 있었을까. 빡빡한 배차를 맞추기 위해 불편한 기숙사 생활을 견뎠고, 박봉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저마다 가장 노릇을 해냈던 버스 안내양의 삶을 말이다. 자신의 안녕이나 행복보다는 가족을 위해 생활비를 보내던 가난했던 그녀들이 드라마 속에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버스 안내양의 그림자보다는 빛을 조명하기로 작정하고 드라마를 활기로 가득 채운다. 고강도 노동 환경에도 드라마 속 안내양들은 늘 웃고 떠들며 즐겁게 생활한다. 상하 위계가 명확해 종종 안내양에게 욕설을 퍼붓던 버스 기사와도 화기애애하고 회사 관리자와도 그렇다. 이들을 괴롭힌 게 착취적 노사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기숙사 방의 ‘일진’ 방장인 것처럼 그려져 뜨악했다.


이들의 열악한 삶은 빡빡한 운행 스케줄, 낮은 임금, 개문발차로 위협되는 안전, 취약한 기숙사 시설, 그리고 무엇보다 버스 요금 삥땅을 막는다는 취지로 감행된 알몸 수색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알몸을 뒤진다니, 상상도 안 되겠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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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 중공업 고공 농성자 김진숙의 책 <소금꽃 나무>에는 한때 안내양 시절 알몸 수색을 당하던 기록이 슬프게 남아 있다. “배차 주임이나 기사들 정비사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히물거리고 서 있는 것보다 더 이상했던 건, 알몸으로 서 있는 여자들의 무연한 태도였다.” 드라마가 감춘 그림자에는 수치를 잃을 만큼의 폭력이 그 시절 안내양의 삶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드라마 속 노동쟁의는 그림자를 빛으로 만들기 위한 진실 회피에 가깝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인 1982년은 전두환 군사 정권기로 박정희 정권 못지않게 노동 탄압이 극심했던 때다. ‘여공’들의 노동운동은 60-70년을 거쳐 80년대에도 가열차게 이어졌지만 가혹한 탄압 속에 처참했다. 그런데 촘촘하게 조직된 노동조합도 없이 안내양의 노동쟁의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인 인천에는 동일방직이라는 오래된 섬유회사가 있었다. 이들에겐 70년대 ‘여공’ 중심으로 꾸려진 최초의 ‘여공’ 중심 노동조합이라는 강력한 노조가 있었지만, 이들조차 신군부와 회사의 악랄한 노조 파괴로 압살당할 정도였다. 동일방직의 노동쟁의는 ‘똥물 테러’와 ‘알몸 시위’를 겪으며 철저히 짓밟혔고, 이후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먹고 살 길이 막히는 참혹한 삶을 견뎌야 했다.(동일방직 여성노동자 50년 투쟁의 기록 <긴 투쟁 귀한 삶> 참고)


그런데 노동자를 규합하는 노조도 없는 버스 안내양들이 어느 날 돌연 노동자성을 획득해 분연히 일어나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쟁의에 돌입하고 결국 승리로 끝난다는 설정은, 아무리 안내양들 간의 연대감을 고취하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심화하기 위함이라 해도, 당시 노동 환경에 대한 무지나 소외가 부른 과도한 노동운동 낭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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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영례(김다미)와 종희(신예은)의 우정을 그리려다, 돌연한 사건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함으로써 우정을 심문하기에 이른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한 남자는 두 여자 사이를 오가다 더 좋은 여자에게 귀의한다는 설정이 지금의 해석으로 유의미한가.


영례가 남자의 선택을 받는 이유 또한 그녀의 고유함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갸륵한 심성 때문이라는 결론 또한 구태하기 짝이 없다. 드라마가 80년대의 지지부진한 우정과 사랑을 그때가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그리려 했다면, 좀 더 신선한 해석이어야 했다.


이 드라마가 견지하는 진부함의 화룡점정은 두 여자의 미스코리아 진출이다. 80년대는 페미니즘의 태동기였고 이후 미스코리아 폐지 운동이 벌어진 맥락을 유념한다면, 두 여자의 경쟁과 성취를 다루기 위해 미스코리아 대회가 모멘텀으로 쓰인 건 게으른 선택이다. 그리고 영례의 캐릭터를 훌륭한 인품으로 완결짓기 위해 종희를 이기적인 캐릭터로 몰락시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종희는 가정폭력 피해자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압제자인 오빠로부터 탈출한 주체적인 인물이고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의리 있는 여자다. 무엇보다 피해자이지만 명랑하게 살아가는 의지의 캐릭터인데, 종반에 피해의식에 찌든 나르시시스트로 만든 까닭을 모르겠다. 명례의 지나치게 부담되는 ‘캔디’ 캐릭터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전진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붕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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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드라마의 이해할 수 없는 가부장 서사다. 드라마 인물 중 정분(박예니)은 김기사(이재원)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싱글맘이다. 어느 날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김기사는 염치도 없이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하려 든다. 과거 버스 회사에서 거의 모든 안내양에게 작업을 걸고 무책임한 치정을 일삼던 불치의 바람둥이가 불현듯 알게 된 아이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되려 한다는 허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다 자신의 부주의로 아이를 잃어버리게 된 위기를 계기로 성철(이원정)의 헌신적인 돌봄에 감명받아 정분과 딸을 부탁한다니, 이는 자격도 없는 남자가 여자와 딸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떠넘긴다는 부정의한 가부장의 거래도 문제지만, 우등한 남자의 선량함에 감화되어 자신을 반성하고 갱생한다는 남성연대 서사도 문제적이다.


또 하나의 괴상한 가부장 서사는 종남(정재광)의 개과천선이다. 그는 동생 종희를 개 패듯 때리고 괴롭힌 가정폭력범이다(가정폭력은 살인미수를 미화한 부적합한 표현이다). 맞아 죽느니 탈출을 선택한 동생을 끝까지 쫓아와 괴롭히던 그가 동생의 안위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고?


이는 동생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때리는 건 괜찮지만 다른 놈이 손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소유물에 대한 침해가 부른 가부장의 ‘빡침’이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한 희생으로 미화된다. 드라마는 폭력적 가부장마저 향수하라는 것인가. 추억은 대체로 왜곡되기 마련인데, 이것 하나는 명확히 보여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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