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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Dec 02. 2019

[동백꽃 필 무렵]의 ‘페미사이드’, 무섭고도 무섭다

높은 시청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동백꽃 필 무렵]이 종영했다. 어떤 채널에서 어떤 드라마가 방영되는지를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내게, 본방 사수란 ‘미션 임파서블’이다. [동백꽃 필 무렵]도 IPTV 돌려보기로 뒷북을 쳤다. 4화를 남겨두고 있다. 


로맨스에 어울릴 듯하지 않은 연쇄 살인이라는 스릴러를 혼재시킨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미혼모 동백과 총각 용식의 연애서사가 여성주의적이다 아니다로 논쟁이 엇갈렸는데, 보다 보니 호불호의 갈래도 제각각 설득력이 있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여성주의 논쟁이야 후론하더라도, 동백과 용식의 연애서사가 또 하나의 연애 판타지를 만들어냈음은 틀림없다.     


불편한 존재인 미혼모 동백을 누구랄 것 없이 배제시키는 ‘옹산’에, ‘짠’하고 나타난 용식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백마 탄 왕자’라는 구원자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가부장의 잔재를 일소하지 못했지만 여튼, 모두 하찮게 여기는 동백이라는 여자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려한 용식을 누구라 바라 마지않겠는가. 용식의 사랑이 결함 없는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이의 반의 반의 반에도 못미치는 남성중심의 ‘제 맘대로 사랑’(협박하고 때리고 죽이고도 사랑해서라고 우기는)에 여성들이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리라.     


물음은 어떻게 향미가 죽었는가가 아니다. ‘누가’ ‘왜’ 향미를 죽였는가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과 용식 말고 내가 주목하게 된 인물은 ‘향미’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동백과 향미가 견지하는 삶의 자세는 얼핏 다른 듯 대비되지만, 자원이 전무한 여성의 삶이 치열한 생존 싸움이라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팍팍한 삶일망정 의지대로 강인하게 사는 것처럼 비치는 동백의 삶이나, 생존하기 위해 그나마 가진 것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막가파’ 식 향미의 삶이 실상 다른 것일까. 평범이라는 범주에 벗어난 ‘여자’가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은, 굴욕감을 뻔뻔하게 두려움을 대차게 혹은 안하무인으로 가장하는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면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꿈을 키우며 ‘헬조선’의 치욕스런 삶을 버티어내던 향미가 결국, 동백의 돈을 훔쳐 내 코펜하겐으로 ‘탈조선’을 감행하지만, 코펜하겐의 동생은 타인이 향미를 ‘그런 여자’로 비하하고 혐오하듯 냉혹히 거부한다. 향미는 혈육에게마저 버려졌다. 


비참한 향미의 모습은 과거 저임금에 시달리며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도 ‘창피한’ 혈연으로 귀결됐던 ‘공순이, 빠순이 누나’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여전히 여자(누나, 여동생)는 몸을 자원화해서라도 가족을 먹여살리는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이보다 염치없을 수 없지만, 결국 갈 곳이 돈(신의)을 훔쳐낸 동백일 수밖에 없는 향미는 난생처음으로 ‘마이웨이’를 다짐하며 귀환한다. 하지만 돌아온 향미가 살인범의 먹이가 되리란 암시로 불안하던 마음은, 호수에 수장된 흔적과 마침내 시신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패닉에 휩싸이고 말았다. 왜 향미가, 왜 동백이, 왜 무고한 그녀들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분노는 몸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페미니스트 다이애나 러셀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문화에서 발생하는, 혹은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기반을 둔, 남성의 여성살해를 ‘페미사이드’로 정의했다. 까불이가 동백을 죽이려다 향미를 죽이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목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표적 삼았다는 데서 향미의 죽음은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명백한 ‘페미사이드’다.


까불이는 향미를 해치기 앞서 이미 왁싱숍을 혼자 운영하고 있는 여성을 노렸고, 현장을 사전조사하고 살인을 계획 결행한다. ‘홧김에’ ‘술김에’ ‘우발적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범죄 표적을 정했고, 표적을 완전 장악할 수 있음을 파악했고, 표적 여성이 혼자 있는 시간을 택했다는 점에서, 절대 ‘묻지마 범죄’라 불릴 수 없다.     

왁싱숍 살해 현장의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것이 동백이 까불이의 다음 표적이 된 모든 이유일까? 동백이 미혼모에다 술집을 한다는 것, 무엇보다 공격에 취약한 ‘여자’라는 것이 죽일 이유에 보태진다면, 이는 단순한 목격자 살해가 아니다. 향미 역시, ‘그렇고 그런 여자’고, 죽어도 누구하나 관심 가지지 않는 ‘여자’라는 점에서, 이는 우발적 범행이 아니다. 살인 피해자들이 ‘여자’라는 손쉬운 범행 대상인 아니었다면, 까불이의 범행이 연쇄로 이어지지 않았을 터, ‘페미사이드’의 혐의는 더 짙어진다.

    

여성혐오의 샴썅둥이 ‘페미사이드’    


‘페미사이더’를 미디어에서 다루는 방식은 어이없게도 여성의 피살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처럼 상정되곤 한다.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에겐 살인을 저지른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오도되곤 한다. 연쇄살인범에게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고, 그 어린 남자아이를 학대한 ‘나쁜 엄마’가 등장한다.

    

드라마 [터널]의 목진우(김민상)는 잘 나가는 국과수 부검의다. 유능하고 냉철한 부검의에다 말끔한 매너를 갖춘 젠틀맨의 전형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엄마는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로 그려지고, 그런 엄마에게 정서적으로 학대당한 그는 엄마를 혐오하게 되고, 엄마로 대리되는 ‘여자’를 혐오하기에 이른다.


‘품행이 좋지 않은 엄마’에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정이 허락되지 않는다. 본래 나쁜 여자가 나쁜 엄마가 되어 ‘남자아이’를 악마로 만들었으니, 악마의 손에 처단되는 여자는 죽어 마땅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구한 여성혐오로 빚어진 ‘페미사이드’가 재현되는 방식이다.     

7명의 여자를 살해해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를 형사 ‘김형민’(김윤석)이 밖이 아닌 감옥에서 좇는 영화 역시, ‘페미사이드’의 전범을 보여준다. 강태오는 대담하게도 형사에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일곱이라는 조건부 자백을 한다. 교도소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영치금과 보급품이 필요했던 강태오는 김형민과 위험한 거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신병자 싸이코패스가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를 처단하는 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살인범에 대한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죽여도 탈나지 않을 여자를 선택했고, 잔혹하고 지능적이게 완전범죄를 실행했다. [암수살인]은 연쇄 살인범이 전혀 ‘또라이 싸이코패스’가 아님을, 그의 범죄가 ‘묻지마 살인’이 아님을 촘촘히 파헤친다. 모습을 드러낸 화성 연쇄 살인범이 싸이코패스가 아닌 것처럼.  


강태오에겐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를 처단한 것이 첫 살인이었다. 이에 침묵으로 공모한 그의 누나가 당시 그의 존속살해를 눈감지 않았다면, 최소한 아버지의 실종 신고만이라도 했다면, 강태오가 살해한 여자들의 사체가 나왔을 때 초동수사만 제대로 했다면, 강태오의 페미사이드는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양심’을 가진 형사 김형민의 비탄이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런 형사를 대면한 일이 없다. 


되려, 왜 그런 옷차림을 했느냐는, 왜 늦은 시간에 그곳에 있었냐는, 왜 성폭행을 당하고도 그런 카톡을 주고 받았느냐는, 왜 폭행의 빌미를 주었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읍박지르는 번득이는 형사의 눈빛만을 보았을 뿐이다.     

‘여자’라서 죽은 사건이 ‘묻지마 살인’으로 돌변 명명되며 논쟁을 낳았던 ‘강남역 살인 사건’은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가 어떻게 ‘페미사이드’를 정신병자에 의한 감정 불가한 사건으로 은폐하려 하는가를 극적으로 내보였다.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표적해 몇 시간을 기다렸고, 평소‘여자마저’ 자신을 무시해 기분이 나빴다는 여성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는데도 ‘묻지마 살인’으로 귀결되지 않았던가.     


후반으로 갈수록 나는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여성들이 우연히 살아남았던 것처럼, 동백이야말로 향미 대신 ‘우연히 살아남지 않았는가? 향미의 죽음을 대면하면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무섭고도 무서웠다.


까불이는 우리가 주위에서 만날 수 없는 괴물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동네 아저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인 까불이가 까불지 말라고 지목하고 죽일 수 있었던 대상이 ‘여자’였다는 것이, 그것도 약자 중 약자인 향미였다는 것이, 그리고 이 공포가 극이 아니라 현실에 스며있다는 사실이, 심장이 오그라들게 섬뜩했다.

    

며칠 전 지인의 바뀐 ‘프사’ 사진을 보고 울고 말았다. 차례로 세상을 등진 설리와 구하라가 같이 찍은 어여쁜 생전 모습이었다. ‘누가 이 여성들을 죽게 했는가’를 묻고 캐내는 일을 간단히 ‘추모’라 불러서는 안 된다. 부정해왔고 은폐해왔던 사회적 사실로서의 ‘페미사이드’를 인정하게 하고 어떤 대책을 강구할 것인가의 논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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