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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08. 2020

시집을 읽고 나니 몸이 뻐근했다 산에 오른 줄 알았다

[가슴속 반딧불로 불을 밝혀] (이지우, 2020, 좋은 땅)


자꾸 억울하고 자주 눈물이 나던 때였다. 마음속에 불기둥 같은 것이 일어나면 나를 활활 태울 것만 같았다. 불을 끌 재간이 없어 이리저리 헤매다 기어든 곳이 산이었다. 무작정 산을 오르던 그때, 나는 산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밑도 끝도 없던 이 산속의 시간들이 이지우 시인의 시집 [가슴속 반딧불로 불을 밝혀]을 읽자, 정말 반딧불처럼 점멸하며 되살아났다. “삭히지 못한 아픔 몰래 토해내며 수많은 고개를 넘고 또 넘었던” 시간들이.     


그날도 새벽을 달려 산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은 한적했다. 차에서 빠져나오자 볼이 쩍 갈라지는 한기가 끼쳤다. 겨울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은 초입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했는데, 산이 온통 눈 바다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너무 황홀한 나머지 뛰듯이 걸어 들어갔지만, 곧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깊은 눈에 무릎까지 빠지자 마치 늪에 빠진 형국이었다. 겨울이고 산이니 당연히 눈이 있겠거니 했지만, 무작정 나 홀로 산을 오른 초보 허당 등산객의 깜냥으로는 산에 이렇게 많은 눈이 쌓였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달랑 물만 챙겨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는 철렁함. 돌아서려니 좀 서러웠던가.     


“힘들면 천천히 쉬어가면 되는 것을/어머니, 내 그림자에 쫓기며 걷습니다/좁은 가슴속 길은 자꾸만 꼬이고 뒤틀려/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허둥대며 제자리만 맴돌 뿐입니다”<‘백두대간을 걷습니다 3’ 중에서>    

시집을 읽자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내리며 쓴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그와 동시에 산을 타고 넘는 일이다. 시인의 발부리를 건드린 돌들, 시인의 옷자락을 스쳤을 나뭇잎과 가지들을 생생히 복원한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삐져 들어오는 조각 햇빛을 올려다보느라 시인의 눈처럼 눈이 시려온다. 들숨날숨에 파묻힌 노곤함으로 쉬이 떼지지 않는 발걸음의 무거움이 묵직이 전해진다.


그러다 번득, 시인에게 들이닥친 환희의 순간에 함께 아득해진다. “푸른 하늘 아득히 펼쳐진 새털구름/부드럽게 휘감기는 햇살의 감촉/일렁이는 나뭇잎의 작은 속삭임”<‘백두대간을 걷습니다 9’ 중에서>은  독자를 이미 산 속으로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길에서 지치는 것은 등산객의 숙명이다. “혼자 가야만 하는 길, 참고 견뎌야 하는 길은 너무나도 멀”다. 몸을 길에 갈아 넣으며, 왜 걷는가, 왜 오르는가 수없이 되물으며, 고개마다 한 줌의 뼛가루를 뿌리면서도 멈춰 서지 않는다. 다시 거두어 가지 않을 심산으로 굽이굽이에 꽃아 둔 온갖 상념들을 뒤로 한 채 걷고 또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만이 길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러다 문득, 이렇게 걸어온 길이 실은 혼자 취해 떠돈 길이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누군가를 불러보았던가.    


“내려갈 때 내려가고/올라갈 때 올라가며/바로 앞에 놓인 길부터/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되는데/지나온 길 후회에 발목 잡히고/가야 할 길 걱정에 애태웁니다” <‘낙남정맥을 걷습니다’ 중에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계속 걸어가면/당신 품속 같은 세상/아무도 울지 않는 세상에/도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한북정맥을 걷습니다’ 중에서>    


산의 시간들은 앞서간다. 한 겨울에도 봄의 기운을 태동하고 먼저 짙어지는 나뭇잎들은 뜨거워질 땅의 시간들을 알려준다. 숨 막히는 태양의 시간이 지나면 저를 붉고 노랗게 염색시키고는 곧이어 모든 옷을 벗어젖힘으로써 오히려 살을 애일 눈바람에 몸을 내어 놓는다.


아직 사계절이 있는 한반도에서 산의 시간들을 마주하는 일은 사람을 유일하게 사람을 무릎 꿇게 하지만, 이조차도 때로 더 건강해지려는 사람들로 아직도 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로 산은 번번이 배반당한다. 산에 들어가서도 산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산을 아프게 하면서, 왜 오르는 걸까.     


인근의 둘레길을 별 작정 없이 걸을라 쳐도, 약속이나 한 듯 균질한 디자인과 색상의 등산복을 빼입은 멋쟁이 등산객들을 만나면 머쓱해진다. 잠깐 마실 나온 복장인 나의 헐렁한 바지 느렁한 티셔츠가 무색하다. 내가 미친 듯이 산을 헤매던 때는 달리 등산복이랄 것도 없이 그저 편한 옷이 등산복이었는데. 모두 방금 아웃도어 숍에서 빠져나온 듯 멋을 낸 등산복은 고작 앞 뒷산을 오르면서도 히말라야 봉우리를 접수할 기세들이다. 허긴 마음은 다들 등반가들일 테니.   

 


“돌덩이로 굳어진 눈물을 가슴에 품고 우뚝 솟은 산”, 한라산. 열 살 딸애와 올랐던 그 산. ‘조금만 더 가면 꼭대기야’ 수 번을 공갈을 치다, 더는 속지 않는 딸에게 뭐라 했던가. 9 시간 장정의 길에 다리가 납덩이처럼 변하자 나마저 지친 나머지 내가 먼저 ‘엄마야’를 불렀던가. 여기 왜 발을 들여놓았던가 했던가.    


“빨리 가지는 못하지만/끝까지 가리라/어머니, 설익은 아픔이 무르익도록/천천히 걷습니다”<‘팔공기맥을 걷습니다’ 중에서>    


“어머니, 열 걸음을 걷는데/십 년이 걸릴지라도/이 길을 계속 걷고 싶습니다” <‘땅끝기맥을 걷습니다’중에서>      

결국 산에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 이른 해가 반짝일 때 들어선 초입에 어둑한 산 거미를 마주하고서는 안심해서 한숨을 쉬었던가. 다시 이렇게 내려올 것을 죽자 사자 올랐던 일이 허무해서 속울음을 울었던가.     


이제 더는 신이나 산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몸이 되었다. 발목을 잡아주는 등산화도 몇 십 분만 걸으면 시큰대는 발목엔 속수무책. 큰 맘 먹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뒷산이라도 오른 날엔 감겨오는 허리 통증까지 감내해야 하는 신세다. 이제 언감생심 먼 산, 깊은 산, 높은 산은 ‘아 옛날이여’다. 이런 곤궁한 몸으로 살다 [가슴속 반딧불로 불을 밝혀]을 다 읽고 보니, 이런 먼 산, 깊은 산, 높은 산의 봉우리를 노닐다 온 듯 노곤하다. 아. 이 맛이었는데...     


[가슴속 반딧불로 불을 밝혀]을 읽고 나면 독자는 두 가지에 깜짝 놀라게 된다. 산이 많은 나라임은 알지만 한국에 백두‘대간’외에도 ‘기맥’(금강기맥, 금북기맥, 땅끝기맥 등)이라 불리는 산줄기들과 그 줄기들에 이어 솟은 산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나와, 이 수많은 대간, 기맥, 산, 섬을 섭렵한 시인의 가공할만한 발걸음이 나머지 하나다. 시인은 대체 얼마를 걸은 걸까? 상상할 수 없는 거리에 아득해진다. 그의 산행 마일리지는 시집을 읽으며 독자가 직접 계산해 보시길.    


시집 [가슴속 반딧불로 불을 밝혀]의 백미는 시인의 혼을 담은 시어와 각 시마다 함께 하고 있는 사진들의 환상적인 조화다. 시집인 듯 사진집인 듯 야릇하게 매혹되며 독자는 시인의 언어를 경유한 산의 굉장한 언어와 접속하게 될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공연히 가뭇없는 슬픔에 눈물이 배어나올 지 모른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때로 같은 말이기에. 


눈물을 마르게 하고 머릿속에 내내 맴돈 질문을 꺼내 본다. 시인은 그리움 고달픔 서러움 간절함 등의 탄식에 늘 ‘어머니’를 호명한다. 시인이 고된 걸음마다 산에서 초혼하듯 부른 ‘어머니’는 대체 누구인가. 왜 어머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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