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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26. 2020

'아기 20만원' 그녀에겐 어떤 선택권이 있었을까

'36주 아기 판매' 사건을 지켜보며

   


‘아기 20만 원’ 사건의 파장을 지켜보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평소 여타 여성과 관련된 범죄(성폭력, 디지털 성범죄, 불법 촬영 등)에는 미온적인 경찰이 이 사건이 문제가 되자 즉시 해당 애플리케이션의 IP 주소를 추적해 이 여성을 찾아냈다는 소식에는 더 아연해졌다. 이렇게 글을 열면 일부 누리꾼들은 이 여성을 두둔하려 한다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험담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죄인이든 두둔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 여성도 변호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겠다.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입에선 ‘세상에’와 ‘오죽했으면’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세상에’가 새어 나온 이유는 아마도 아기를 판매하겠다는 발상이 충격적이기 때문이었을 텐데, 생각을 진전시켜 아기를 팔아 왔던 세계의 잔혹사나 한국의 해외 입양 실체를 들여다보면, 영아를 판매한 주체가 다름 아닌 국가임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실이 이렇다면, 어떻게 아이를 판다고 하느냐고 어린 엄마에게 퍼부었던 비난은 문득 번지수를 잃게 되지 않는가.  

   

아기는 이미 판매되고 있다    


이미 아기를 만들어내는 난자와 정자가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판매된 정자와 난자가 체외수정으로 배아가 탄생하면 당연히 이를 키울 여성의 포궁이 필요하다. 난자와 정자의 시장이 존재한다면 포궁을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시장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대리모 시장이라 불리는 여성 포궁 시장은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의 포궁을 사들여 계약, 대여, 매매하고 있으며 이를 사들인 제3자가 출생한 아이의 양육자가 되고 있다. 아기의 탄생을 여전히 고귀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날로 확장되는 대리모 시장은 적나라하게 표현해, 아기를 판매하는 물건으로서 다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 어떤 여성이 이 위험하고 고단한 대리모를 자처하는 걸까? 말할 것도 없이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이다. 여성을 심대하게 착취하는 대리모 산업의 문제는 이처럼, 빈곤과 인종, 계급, 성, 장애가 얽힌 복잡한 문제다. (<대리모 같은 소리> 참고)    



신우생학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단 유전공학이 날로 발전하면서 해외 여러 나라에선 이미 대리모에 대한 문제가 급부상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대리모에 대한 화두가 다루어지고 있지조차  않다. 한국의 경우 대리모는 아이를 얻는 합법한 수단이 ‘아직’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대리모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누가 대리모가 될까? 이 역시 물으나 마나 가난한 여성이다. 자신의 포궁을 내놓아 돈을 벌여야 할 만큼 가난한 여성에게 사회는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또한 홀로 아기를 낳아 키워야 하는 여성에게 사회는 어떤 대안을 제시해 주었을까?


포궁을 내 놓아야 하거나 아기를 내 놓아야 하는 사정을 비난하기 이전에 우리는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인류의 역사 내내 임신, 출산, 양육은 언제나 여성에게만 고통이었다. ‘아기 20만 원’ 사건의 그 젊은 여성도 이 고통의 대열에 서 있었을 뿐이다.    


아기를 판매한 뼈아픈 치부는 한국의 해외 입양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리사 H 오의 역저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는 한국 입양의 실체를 방대한 자료로 낱낱이 파헤쳐 독자를 은폐된 진실에 직면하게 한다.     


한국 전쟁과 미군의 주둔으로 상당한 GI 베이비들이 탄생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아이들을 “진정한 한국인”이라 믿지 않았다. 미국 난민구호법의 고아 프로그램을 “인종 청소 방법”으로 활용한 이승만 정부는 혼혈 아동인 GI 베이비들을 대거 입양 보냈고 부끄럽게도 이로써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한동안 미국의 G I베이비 입양은 독실한 기독교인과 기독교적 미국주의자들이 함께 펼치는 혁신 운동처럼 펼쳐졌다. 60년 대 초부터 GI 베이비들의 미국 입양은 줄지만,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더 많은 아기들을 해외로 입양 보냈고, 마침내 1985년엔 8873건이라는 믿을 수 없는 숫자로 ‘아기 수출국’이라는 오명에 정점을 찍었다.     

입양 보낸 대부분의 영아들의 개인사를 보면, 국가가 어떤 아기를 받아들이고 어떤 아기들을 버렸는가가 명확해진다. 미국으로 대거 입양된 GI 베이비는 ‘양공주’라 멸시된 기지촌 여성들의 가슴 저미는 아픔을 빼고 말할 수 없다. 기지촌 여성들을 달러의 화수분으로 이용해 국가의 경제를 견인하게 했지만 기지촌 여성이나 그들의 혼혈 자녀들은 무참히 버려졌다.


"1956년에 한국에서 미국까지 실어 나르려면 아이 한 명당 253달러가 들었다. 그 정도 돈이면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충분히 키우고도 남을 것“이라는 증언은, 어떤 아이들이 추방되었는가를 아프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GI 베이비 외에도 해외로 입양 보낸 대부분의 아기가 미혼모의 아기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방증하고 있는가. 정부는 아동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고 안정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미혼모에 대한 보육과 양육 정책으로 책무를 수행하는 대신,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미혼모의 아이들을 해외 입양시키는 유기와 판매로 그 책임을 스스로 버렸다. 이것이 아기 판매의 실체다.     


‘아기 20만 원’의 여성에게 혼자서도 아기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경제적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 여성은 그런 참혹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성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해 사회는 어떤 책임을 다했는가 반성해야 한다.


이른바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가정의 어떤 생명은 보호할 가치가 있고, ‘미혼모’라 불리는 여성의 어떤 생명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규정해 온 국가의 유구한 차별과 배제의 정책은 어째서 비난받지 않는가. 나는 국가에 묻는다. 진정으로 저출생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아직도 미혼모에 대한 보육정책이 차별적이며, 왜 여전히 귀한 아기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인가?     


그녀에겐 임신을 중단할 선택권이 없었다    


끝으로 ‘아기 20만원’ 사건의 당사자인 여성의 임신 중지권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그 여성에게 임신을 중단할 수단이 있었다면, 그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한 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대한 존중과 보장을 위해 정부는 그 여성에게 피임과 임신 그리고 출산에 대한 정확하고 적확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그리고 그 여성에게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단을 주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사회라면 그 여성을 비난할 어떤 자격도 없다. 정부는 낙태죄를 폐지하라. 그리고 여성들에게 안전한 임신 중지를 보장하라. 그 여성에게 임신 중지가 권리였다면 그녀는 그런 위기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낳았으면 책임지라고 호언하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다. 게다 여성 홀로 그 책임을 지고 있다면 그 사정은 전혀 녹녹치 않다. 남편 없이 엄마 혼자 아이를 키워낸다고 해서 모두 꿋꿋한 ‘동백’의 현신이 될 수는 없다. 힘든 환경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을 ‘동백’으로 낭만화는 우를 범하는 대신, ‘동백’이 자신과 아이를 돌보며 잘 살아갈 수 있게 국가는 온 힘을 기울여 조력해야 한다.


아무 자원이 없어 아이를 포기해야 했을 한 여성에게 쏘아대는 말 화살을 이제 그만 멈추기 바란다. 그녀는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며 이에 못지않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이미 새겼을 것이다. 이로써 불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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