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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Dec 30. 2020

재미있어도 빵점 받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리뷰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어쩌다 결혼 후 연애’라는 생존형 커플의 연애 문법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이로써 월세 수입이 필요했던 집주인 세희(이민기)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던 세입자 지호(정소민)는 식상할 정도로 예상되는 ‘밀당’을 통해, 무난히 진정한 결혼 커플로 거듭날 전망이다.


따라서 이 귀여운 커플의 서사는 상상 대로로 보장됐으니, 이보다는 이 드라마가 여성 캐릭터를 지나치게 스테레오 타입으로 다루고 있는 안이한 설정(성 인지적 관점이 너무 바닥이라 이상해서 살펴보니, 2017년 산 드라마였다)에 대해 언급해 볼까 한다.     


공부 못했고,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아니면, 젊은 여자는 모두 결혼에 목맨다?     


남해 삼총사 중 하나인 호랑(김가은)은 레스토랑 매니저로 나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간다. 게다 7년이라는 경이로운 동거 연애를 롱런하며 아직도 동거남 원석(김민석)과 알콩달콩 지낸다. 하지만 호랑은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고 있는 자신의 나이가 불안하다. 이제는 결혼을 통해 원석과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커플이 되고 싶고, 그간 모은 돈으로 옥탑방도 벗어나고 싶다.     


반면, 천재라고 믿을 수 없는 타고난 눈치 없음 DNA를 보유한 원석은, 호랑을 사랑하지만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지 회의적이다. 결혼 제도 자체에 반기를 드는 세희류는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생계부양자라는 남성중심사회가 주조한 위치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원석으로 하여금 목전에 닥친 현실을 인정하고 호랑과 위기를 돌파하도록 구성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호랑을 “결혼이 꿈”인 철없는 여자로 만들려 시도한다.   

  

7년을 동거했고 서로 계속 살아도 좋겠다고 판단된 관계라면, 결혼을 생각하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7년을 살았어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면, 동거를 깨면 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상식적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원석의 무능한 상태를 ‘고개 숙인 남성성’의 외피를 입혀, 남자가 저렇게 일이 안 풀려 고전하는데, 여자는 한가하게 결혼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호랑은 보이는 모습과 달리 철부지가 아니다. 천재지만 가난하고 센스 없는 원석과 미래라는 배에 같이 올라탄 것은, ‘금수저’를 등에 업은 무임승차로 치르게 될 결혼의 심리적 비용을 상계한 결과다. 이런 똘똘한 계산은 생각 없는 여자의 셈법이 아니다.


게다 동거가 소꿉장난인가? 동거도 결혼과 똑같은 생활이다. 7년 동거가 과연 무능한 원석의 경제력으로 견인됐을까? 호랑이 사랑과 신뢰로 결실을 보려는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결혼으로 원석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근거할 것이다.    

 

동거나 결혼을 아직도 남자의 우월한 경제력에 기대려는 안일한 여자의 선택이라 전제하려는 드라마의 서사는, 2017년 산 동거 서사라 해도 너무나 구태하다. 게다 호랑의 결혼관을 비커리어 우먼의 조급증이라 그리고 있는 점도 시대착오적이다.


경제력과 무관하게 여성이 남성보다 결혼 의사가 훨씬 적다는 통계는 호랑의 결혼 집착이 시대적 현상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유대감에 있을 텐데, 글쎄...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삼총사의 우정도 견고한 마당에, 굳이 “결혼이 꿈”이 되려면, 드라마는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공했어야 하지 않을까.    



범죄 수준의 성희롱을 참고만 있는다고?  

  

수지(이솜)는 남자들만 드글대는 대기업의 엘리트 커리어 우먼이다. 야망도 있고 능력도 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만만치 않다. 유리천장에 곧 치받칠 테고 무엇보다, 여직원을 성적 대상화하는 “개저씨”들의 집요한 침해는 참기 어려운 수준이다.


미투가 대대적으로 터져 나오기 전임을 감안하더라도 수위가 높다. 여직원 SNS 친구 수락을 집요하게 요구하며 사생활을 넘보고, 몸매를 품평하는 것은 기본이고 속옷(브라)의 착용 여부까지 언급하며 내기를 벌이는 저급한 성착취 문화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대기업에서 여직원으로 살아봤냐”는 수지의 일갈은 마초 집단에서 살아내기 힘든 여성의 고초가 신산하게 드러나지만, 이 정도 범죄 수준의 일상화된 성희롱은 웃어넘길 수 없는 선을 명백히 넘어서고 있다. 이쯤에서 시청자는 똑똑한 수지가 더 이상 성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고 구조적 문제 제기를 대차게 제기하기를 바라지만, 개인적인 사소한 복수, 일침을 놓는다거나 성희롱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미러링 등, 로 대처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연출한다.


수지와 같은 소극적 대응은(어쩌면 이 정도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있겠지만) 문제 제기를 해봤자 결국, 피해자만 2차, 3차 피해를 입는다는 구조적 가해 관행에 근거하고 있고, 이는 통계적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드라마의 일상화된 가해와 피해 재현은 죄의식 없는 남성 동맹의 가해 문화와 무기력한 피해자 지형을 지나치게 무심하게 폭력적으로 연출한다. 성폭력의 진짜 문제는 괴물의 외피를 입은 악랄한 성범죄가 아니라, 여성들의 하루를 침탈하는 이러한 일상에 스민 성폭력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2017년의 한계인가....    


“연애는 안 하고 추억만 만든다”는 수지의 연애관은 상구(박병은)의 집요한 구애로 연애 계약서를 작성하고 바야흐로 연애전선을 구축한다. 그런데 ‘구애’로 보이는 상구의 행동을 살펴보면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SNS로 ‘나는 너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의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고, 수지의 직장에 찾아와 무작정 기다리고, 타인과 함께 한자리에서 둘의 내밀한 사건을 노출하려는 저급한 시도를 벌인다. 이것은 전혀 ‘구애’의 행위가 아니다. 명백한 ‘스토킹’이며 범죄다.


남성의 자기만족적 들이댐이 어떻게 연애의 문법으로 통용될 수 있을까. 아무리 2017년 드라마라 해도, 이건 좀 너무 갔다. 게다 문제는 저렇게 똑똑한 수지가 구애와 스토킹을 구분 못하고 저런 저열한 ‘한남’과 연애에 돌입한다고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호, 난센스도 이런 난센스가 없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연애 폭력’에 시달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여성이 목숨 걸고 ‘연애 후 이별’을 해야 하는지, 범죄를 낭만화하는 너무 무심한 드라마의 재현은 여성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받은 여성들의 더는 ‘가만있지 않겠다’고 ‘I can speak’로 쏟아져 나온 미투 이후, 성폭력 지형엔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났을까? 아직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성들이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서로가 증언의 목격자가 되어 대항 담론을 형성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2020년의 수지가 더는 성폭력에 굴하지 않고 미투의 현장에 서 있었을 것을 믿는다.  

   

강간 미수를 타인이 용서한다고?    


드라마가 성인지 감수성의 바닥을 드러낸 결정적인 부분은 지호가 강간당할 뻔한 위기를 다루는 데 있다. 홈리스로 오갈 곳이 없는 지호에게 허름한 거처를 제공한 방송사 PD가 만취해 지호를 찾아온다. 드라마 제작이 난항을 보이자 지호를 찾아와 앙갚음을 하려는 PD의 의도는 명백하다.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스스로 문을 따고 침입해 “나 좋아했잖아”라며 덮치는 놈을 강간을 목적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호의 드라마 팀은 PD의 범죄를 “술김에 한 실수”라며 지호와 억지 화해를 강요하고, 이도 모자라 지호의 의사는 무시한 채 자신들이 혼을 내는 것으로 강간 미수를 무마하려 한다. 이는 무마가 아니라 엄연한 공모다.    

 


2017년의 드라마 수준이 정말 참혹할 지경이다. 게다 지호가 보이는 태도도 석연치 않다. 강간 미수는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강간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미수 역시 피해자에게 심리적, 사회적 타격을 입힌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쯤이야 하며 이 사건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다. 아무리 오갈 곳이 없다지만, 강간 미수를 당하고 지호가 찾아간 사람이 또 다른 낯선 남자 세희라는 것은, 성인지 감수성이 지독하게 바닥임이 드러난 참사다. 승냥이를 피해 호랑이의 소굴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여자는 없다.     


지호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카페의 동료 복남(김민규)의 과한 밀착 장면도 문제적이다. 지호의 머리를 만지거나 외모를 품평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출되고, 지호는 이에 대해 명백한 거부 의사를 보여야 함에도, “내가 뭘 좀 오해하게 했나 본데”라며 가해를 합리화해주고 있다. 이럴 리도 없고 이래서도 안 된다. 이 또한 2017년 산 드라마의 한계라 넘겨야 하나?     


지금까지(11화) 드러난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성인지 감수성은 빵점이다. 이 드라마를 성평등 인식 제고를 위한 비교 지표로 삼을 것을 전제로, 시청이 이루어지길 당부드린다. 성인지 감수성이 일천했던 드라마를 보며, ‘저건 범죄다, 저러면 감옥 간다’를 감별하는 텍스트로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건 2017년 산 성범죄 모델링 드라마다. “따라 하면 큰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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