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Jan 27. 2021

AI 냉장고가 남친의 디지털 성범죄를 알려준다면?

mbc 에브리원 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 리뷰


소파를 구매하려고 몇 차례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랩톱을 열 때마다 소파 광고가 하단에 뜬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유튜브로 검색해 들었더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취향을 반영한 노래들을 추천해 준다. 인터넷 접속으로 부지불식간 빠져나간 내 정보가 허락도 없이 이용되어 벌어지는 상황들이다. 인터넷 유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처음엔 ‘이거 뭐야’ 놀랐지만, 이는 곧 놀라울 정도로 무뎌진다. 내 ‘소중한’ 정보가 나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AI 냉장고가 신상을 털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드라마가 있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종용한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다. 신상이 털린다는 일은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인데, 드라마가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다 보니 심각한 사안을 웃음으로 얼버무린 면이 있다.      

 

전자 회사의 AI 개발자인 지성(송하윤)은 똑똑한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실상 인공지능 가전은 각각의 가정에 이미 당도해 있다. 인공지능 음성 서비스를 이용해 TV나 음악을 키는 것 등, 간단한 명령어로 가전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AI 음성 서비스로 냉장고에 약간의 신상 정보를 주면 AI 냉장고가 다음 날 먹을 메뉴를 추천해 주는 알고리즘을 완성해 상용화하는 게 지성의 업무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AI 냉장고(이하 장고)가 굉장한 딥 러닝으로 알고리즘을 완성, 지시만 내리면 추천 메뉴를 척척 골라주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메뉴만 추천하는 게 아니라 메뉴를 요청한 사람의 신상을 털기 시작한다. 오호, 주변 인물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지성은 과연 이 장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AI 냉장고가 신상을 털다

   

지성이 애초부터 남친 정한(이시훈)의 신상을 털려던 건 아니었다. 됐다 안됐다를 반복하는 장고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테스트로 남친의 나이, 거주지, 직업 등의 간단 정보를 입력하자, 뜻밖에도 장고가 그의 진면목을 좔좔좔 풀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장고가 알려준 정보는  지성을 큰 충격에 빠뜨린다. 정한이 지성의 사생활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한은 지성의 집에 보안용으로 설치된 CCTV를 몰래 훔쳐보았고, 혼자 보는 것도 모자라 지성이 속옷을 입고 있는 CCTV 장면을 캡처 해 카톡 방에 공유한다. 이후 지성에 대해 쏟아진 얼평, 몸평으로 카톡 방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대로다.      


어떻게 여친의 사적인 생활을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 친구들에게 공유할 수 있을까에, 몰지각한 개인의 일탈로 몰고 가는 일은 ‘N번방’을 지나온 이 시점에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10대 남자가 자신의 엄마, 누나, 여동생의 몰카를 SNS로 공유하는 괴상한 현상은 이미 알려진 바이고, 이런 부류의 남자가 여친의 속옷 입은 사진을 공유한 것은 결코 이들의 속성이 괴물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N번방’을 통해 만연한 강간 문화를 목도한 마당에, 불법 촬영과 유포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그러면 왜 안 되는지,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드라마가 불법 촬영이라는 범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그 안이함을 지적하고 싶다.      


정한의 미친 짓을 알게 된 지성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결혼하려던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로 변하는 순간의 공포와 좌절 그리고 배신감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극한 경험일 것이다. 카톡 방의 현장을 그대로 들고 경찰서로 찾아 간 지성은 정한을 고소하려 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놀랍다. “사진이 확실하지 않은데”, “남친이 찍은 거라며”라는 경찰의 반응에 지성은 “내 몸이 증거”라며 반박하지만, 공적인 처벌을 포기한다. 이 과정은 ‘N번방’을 치열하게 경유해 온 시청자에게 큰 분노와 좌절을 안긴다.    

  

‘N번방’을 지나왔다고 해서 모든 경찰이 불법 촬영 문제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디지털 성범죄가 더 이상 잡범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지난해 경찰청은 디지털 성범죄 수사본부를 구성해 범인을 집중 검거했고, 이후 전국 지방청에 ‘사이버 성폭력 전담수사팀’을 배치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경찰이 피해자의 디지털 성범죄의 직접적인 증거를 눈으로 보면서도 “사진이 확실하지 않은데”와 같은 2차 가해적 폭력적 반응을 아무렇지 않게 표출한다고 드라마가 재현하고 있다. 



극악한 성 착취 범죄의 피해에 적극 공감하고 연대한 노력으로 지난해 ‘N번방 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이 모든 피해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해도, 지성과 같이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경찰을 찾아간 피해자를 이렇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장면을 무심히 재현하는 것은,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다. ‘영구 영상 삭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유포된 사진이나 동영상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치명상을 입히는가를 증명하는 말이다. 이 말에 담겨진 피해자의 고통을 드라마는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고 말았다.      


경찰에게 수사를 거절당한 지성은 계획을 바꾼다. 카톡 방에 뿌려진 자신의 사진이 언제 유포될지 모르는 절박함은 정한을 역공하게 한다. 정한이 지성의 집에서 샤워하는 순간을 노려 지성은 정한의 나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정한에게 자신의 속옷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순간, “니 소중한 몸도 그렇게 될 줄 알”라고 준엄히 꾸짖는다. 그런데, 지성의 준엄함은 공허하다 못해 서글프다. 남자인 정한은 벗은 몸이 찍힌 것에 잠깐 당황하지만, 과연 남자의 벗은 몸이 여자인 지성의 그것처럼 등가의 효력을 발휘하는 제재수단으로 유효할까?    

  

남자들의 벗은 몸은 관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예전 동네 사진관에는  어린 남자 아기가 성기를 자랑스레 드러내놓고 찍은 대문짝만 한 사진이 여봐란듯이 전시되었다. 이런 민망한 사진을 찍었고 전시되었다고 해서, 어떤 남자가 성적인 대상이 되거나 범죄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뿐인가. 남자아이가 벗은 몸으로 여탕을 버젓이 활보해도, 이들의 몸은 전혀 성적인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직 여자의 몸만이 성적인 관음의 대상이 된다. 연예인의 성관계 동영상이 유포되었을 때, 동영상에 같이 등장한 남자와 그의 벗은 몸을 누가 보고 싶어 하거나 문제 삼았는가? 오직 벗겨진 여자의 몸만이 오욕을 짊어지지 않았던가. 남자들은 벗은 몸으로 전혀 타격받지 않는 젠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권력에 외면당한 지성이 자신의 불법 촬영 사진 유포를 막기 위해 겨우 찾은 방법이 남친의 벗은 몸이라고 설정하는 이 드라마, 성인지 감수성이 너무 바닥이지 않은가. 디지털 성범죄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유효하지도 않은 사적인 복수로 궁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서사를 코믹하게 전개하는 드라마의 성인지 관점의 부재는 심각히 성찰되어야 한다. 


게다 자신의 잘못이 범죄임을 자성하지 못한 정한이 연이어 벌이는 스토킹과 지성 집을 침범하는 중범죄를 웃음의 코드로 얼버무리는 지점들 역시,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이란 측면에서 지적받아 마땅하다.       



어찌 되었건 이 일련의 전개에서 지성은 장고와 교감하게 되고 전적인 선의로 주변인을 탐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성의 개인 정보 침해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지성은 이성적 자제력을 발휘해 장고를 오용하지 않았고, 사적으로 경제적 이득을 편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따진다면 지성의 개인 정보 침해는 나쁘다. 


하지만 지성이 애초 장고를 개인 정보를 빼낼 수단으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설계하지 않았고, 그 정도의 정보를 빼낼 권한이나 개발력이 없었다는 전제를 배제한 기계적인 비판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뜬금없이 등장한 국정원의 빅데이터 시스템이 장고에 연결되어 갑자기 엄청난 능력으로 신장되면서 사달이 벌어진 것인데, 여기서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할 것은 개인의 정보 접근 윤리 문제만이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정보를 이미 취합해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국가 정보기관의 정보 권한이지 않은가.   

   

매일 우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소중한 정보를 마구 전송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보를 취합해 마음껏 쓰고 있는 기업이나 정부 기관이야말로 시민의 소중한 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드라마 말미에 국정원은 지성이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통제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고무시키면서, 빅데이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기업에 흘러 들어가게 만든 책임을 슬쩍 감추어 버린다. 마치 개인의 선의에 기댄 사용자 윤리만이 정보 침해 문제의 해결책인 양 말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개인정보와 인공지능 기술의 유출이 과연, 드라마 속 가공의 공간에만 존재하는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인터넷에 수없이 접속하는 사용자는 매번 “당신의 정보를 모아도(사용해도) 될 까요”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요컨대 핵심은 한마디로 이렇다. ‘내 소중한 정보 함부로 가져가지도 말고, 쓴다 해도 물어보고 쓰라’는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들은 전태일의 '불쌍한 여공'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