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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r 06. 2021

'내 안의 가부장', 성폭력 2차 가해의 뿌리

지역 신문의 2차 가해를 통해 살펴본 진보 정치 성폭력 문제

       


장혜영 의원의 성폭력 기사를 접하던 날, 다시 한번 경악했고 좌절했다. 또? 그것도 진보 정당인 정의당 당 대표가 성폭력 가해자라고? 돌아보면 이 놀람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가해자다움’에 어떤 특정성(악마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진보 정당의 당 대표 정도면, 그럴듯한 성 평등한 삶을 견지할 거라 믿고 있는 여전한 어리석음 말이다.      


지난달 고양여성민우회 단톡방이 잠깐 소란했다. 파주 지역 신문 <파주에서>의 한 기사가 김종철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장혜영 의원을 2차 가해했기 때문이다. 파주여성민우회와 고양여성민우회의 시기적절한 대응으로 기사는 내려졌지만, 이 사건은 결코 해프닝으로 끝날 수 없는 어떤 징후를 가지고 있다. 


지역 신문인 <파주에서>의 편집인과 발행인이 녹색당 당원이고,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가 바로 <파주에서>의 편집인인데, 그는 파주에서 386 진보 정치인으로 활약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을 접하며 나는, 열렬한 녹색당 당원이었고 2018년 서울 시장 후보로 굉장한 이슈를 던졌던 신지예씨를 아프게 떠올랐다.      


신지예씨를 실제로 만나보게 된 건 서울 시장 선거를 치른 2018년 7월이었다. 페미니즘 강연을 기획한 고양여성민우회가 강연자 중 한사람으로 녹색당 후보로 인상적인 선거를 치른 신지예씨를 초대했다. 보통 여성 정치인이 선거를 치르는 전략은 비슷하다. 당신(남성)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의 엄마나 누이 또는 아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로 나 같은 여성이라고 믿게 하는 ‘뉴 마미즘’ 전략 말이다. 얼마 전 나경원 의원이 방송을 통해 유효하게 부각시킨 바로 그 방식이다. 하지만 신지예씨는 그런 전략을 전혀 구사하지 않았다. 여성성을 강화시켜 표를 얻는 구태를 탈각하고, ‘페미니스트 시장’이라는 슬로건으로 돌직구를 던졌다. 나는 그의 당당함에 반했다.  

    


강연장에서 만난 그는 털털했다. 물론 남성들의 ‘여혐’ 뭇매를 맞았던 선거 포스터의 그 예리란 눈빛은 살아 있었지만 말이다. 서울 시장 선거전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의 페미니즘 정치관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당당한 젊은 여성을 만나면 기쁘다. 이들이 곧 미래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강연 후 질문을 받을 때였다. 나는 녹색당의 가치에 동의하지만 해소가 안 되는 중요한 지점이 있어, 그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녹색당은 이미 내부 성폭력 사건으로 내홍을 겪지 않았나. 녹색당은 한국 유일의 여초 정당으로 페미니즘 정당을 표방하는데, 성폭력 문제를 근절할 의지와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다면 명실상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가 내 질문의 핵심이었다. 그는 신중하나 자신감 있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내 토론을 거쳐 성폭력 예방과 근절 시스템을 구축했노라고. 선선한 그의 대답에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2020년 녹색당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충격이었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좌절이 가슴 아팠다.      


그가 녹색당 당직자였던 가해자를 고소했다는 사실이 적시하는 바는 이럴 것이다. 그가 녹색당내 구축되었다고 믿었던 성폭력 근절(대응)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끊이지 않은 당내 성폭력 사건을 거치면서도 녹색당의 성폭력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그가 성폭력 사건으로 당 내부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의 곤경은 얼마 전 장혜영 의원의 성폭력 사건에서 보인 정의당의 대응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그리고 이 구조적 불능의 징후는 <파주에서>의 장혜영 의원 2차 가해 기사와 맞닿고 있었다. 녹색당원인 기자가 버젓이 2차 가해를 신문에 싫은 것도 모자라, 그의 저급한 기사에 열호를 보내는 진보 연하는 지지자와 녹색당원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정당이라는 녹색당의 진보 정치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도덕적 면허를 누리던 진보 가부장이 성폭력으로 파산했던 부끄러운 역사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의 기치를 건 100인 위원회는 진보 내 가부장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지만 그들은 성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직 보위론’ ‘대의론’ ‘음모론’을 내세워 성폭행 가해자를 비호했고, 2002년 개혁당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진보의 상징인 유시민은 ‘조개론’으로 성폭력 사건을 비하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져온 진보 내 성폭력 사건은 지면이 모자라 쓸 수 없을 정도로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안희정 사건이 터졌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유구하게 이어져온 진보 가부장의 구조적 성폭력 문제의 화룡정점이었지만, 진보는 이를 안희정 개인의 ‘여자 문제’로 치부했다.       


진보 정치의 핵심이었던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거치면서 자칭 타칭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은 분열했다. 권김현영의 말을 빌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미투’로 분열한 건 여성들 그중 386 진보 여성들이었고 이들 중엔 페미니스트라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 성찰은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 포착되었다. 


안희정을 보호하기 위해 각종 SNS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포되던 여론의 메커니즘은 진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증거했다. 가까운 증거는 더 명징했고 충격적이었다. 386 진보의 자부심을 탑재한 지인들은 SNS로 전해지는 가공된 찌라시를 진실로 굳게 믿고 피해자를 ‘꽃뱀’화했다. 성폭력 피해자 장혜영을 신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라 2차 가해한 <파주에서>의 신문 기자나, 김지은을 ‘꽃뱀’ 취급한 지인들 모두, 386 진보 여성이다.     

  

“어떤 자살은 가해”임을 보여준 박원순 성폭력 사건은 어떠했는가. 그의 죽음은 성폭력 무죄를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진보 진영은 똘똘 뭉쳐 박원순을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비호했고, 피해자가 피해자 답지 않다고 다그쳤다. 안희정과 박원순 성폭력 사건의 피해는 맥락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가해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는 점,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감정 노동을 강요당하는 비서였다는 점, 성폭력 사건을 조직에 호소했음에도 어떤 보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 피해자의 내부 조직과 진보진영이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정도의 가혹한 2차 가해를 했다는 점, 그리고 이점이 가장 뼈아픈데, 적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이 가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점이다.  

    


결국 안희정과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통해 진보 진영은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했다. 이런 게으른 몰젠더성은 386 진보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우상호 의원의 2차 가해성 발언, “내가 박원순이다”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박원순 성폭력 사건의 가해성을 인정했음에도, 진보진영은 자신들의 빛나는 훈장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피해자를 마녀사냥했다. “존재하는 위력은 반드시 행사된다”는 공고한 성폭력 구조를 그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다시 <파주에서>의 2차 가해 기사로 돌아와, 그 기사로 기함해 지인과 나누었던 얘기를 전하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내 분노에 소위 ‘운동권’이었던 그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겪어보니 그 사람들, 민주주의고 뭐고, 정의고 뭐고 없더라고요. 그냥 딱 386이에요. 그것밖에 없어.” 그의 일갈은, 민주화 투쟁의 공을 앞세워 자신들만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마치 페미니즘 감별사라도 되는 양 성폭력 사건을 재단하는 386의 ‘습관의 독재’가 바로 진보 내 성폭력의 실체라고 말하는 듯했다.


 끝으로 무엇보다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386 진보 여성들의 ‘내 안의 가부장’이다. 다 껐다고 믿었지만, 미처 꺼지지 않고 다시 살아나 불을 지피는 지긋지긋한 가부장의 불씨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도구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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