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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job 조은 Aug 26. 2021

1호선 지하철에서는 냄새는 어디서 오는 걸까?

평생교육과 노인교육, 그래서 필요하다


1호선 지하철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당신에게



“1호선 지하철은 불쾌해. 노인들이 많아서 그런가? 세포 죽은 냄새가 나더라”


언젠가 같이 지하철을 올라탄 친구가 한 말을 듣고 ‘저건 아니지’ 싶다가도 왠지 모르게 공감이 되어 '그래 니 말이 뭔말인지는 알겠다'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후로는 1호선 지하철을 날 때마다 왠지 노인들의 세포 죽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저 말 한마디에 불편해 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것과 관련해서만 노인들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맹목적인 비난을 쏟는 그와 나를 분리하고 싶었으나 디테일 없이 사유하는 나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저 많은 노인들은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향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


뉴스기사가 보였다.


노인들 중 대다수가 지하철에서 그저 ‘하루를 때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종로3가역에 내리고, 어쩌다 끝까지 가게 되면 온양온천에 한 번씩 놀러가는거고, 그게 아니면 돈이 없는 그 중의 대다수는 종점을 찍고 다시 또 무료로 제공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댓글창은 노인들의 지하철 무료요금과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행하는 민폐에 대한 욕으로 가득했다.

목적지가 뚜렷한 이들 속에 목적지가 없는 노인들은 그저 '세포 죽은 냄새와 못 배워먹은 행동으로 대표되는 지하철 민폐의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내게 ‘왜 노인들은 목적지가 없는데도 지하철을 타고 하루 온종일을 보낼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상 외로 쉬웠다.

'비빌 구석이 없어서'


어쩌면 이 생각이 노인교육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다







노인에게 찍힌 낙인




'지하철 노인'을 검색해봤을 때 나오는 커뮤니티 글



영화 <기생충>에서는 냄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유는 냄새는 일종의 낙인이기 때문이다. 숨기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냄새인 것이다.


우리가 1호선 지하철 속 노인들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릴 때, 그것에 대해서 비난을 늘어놓을 때 우리는 이미 노인들에게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기생충”과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하나를 본다는 것은 그 외에 나머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냄새로 낙인 찍을 때 노인들은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고립을 겪고 있었다.

 

퀴퀴한 방 한 구석이 아닌 아파트에서 고급 향수를 뿌리고 나름대로 괜찮은 자가용을 타고 어딘가를 놀러갈 수 있는 어떤 노인들은 그 손가락질의 끝에 없었다.

'생산 가능 인구'라고 불리는, 그래 일을 하기 위해, 또 자식, 친구 등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는 어떤 노인들은 그 손가락질의 끝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르주아의 타도같은 근대적 관점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인들의 고립은 세대 간의 몰이해에서부터 온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지만 결국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노인교육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 세대 간의 몰이해를 이야기 하는 것은 교육은 단지 한 인간을 일하게 하기 위해서, 사회화를 시키기 위해서 시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교육을 제공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관점을 가진다면 노인들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육은 타인이 나의 정체성과 쓸모를 규정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자신을 위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노인이 쓸모 없다는 그 손가락질부터 우리는 치워내야 한다.

손가락질이라는 낙인이 있는 이상 갈 곳 잃은 노인들은 계속해서 낙인이 찍히고, 그 낙인은 노인들을 계속 해서 쓸모 없는 인간이 되게끔 하는 당위성으로 이끈다는 악순환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우리는 노인들이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지 알려주는 개인, 가족, 사회 차원의 환대와 유대를 (비록 힘들다 할지라도) 이끌어내야 할 미션이 있다.


우리 모두는 결국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하찮아진다.

그럴 때 공동체는 개개인이 그럼에도 가치 있는 인간일 수 있다는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의 고립이 어떻게 개인만의 문제일 수가 있을까?











할미꽃이 아닙니다.






나는 노인교육의 문제는 일단 노인에 대한 단일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유독 노인들에게는 ‘다양한 이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늙어버린 손과 주름진 얼굴에, 약하기만 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에게 ‘노인’이라는 이름이 붙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존재가 아닌 대상이 되어버린다.



개인적으로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시 중 가장 동감하는 시가 있다.

김춘수의 <꽃>이다.

이 시는 이 구절로 유명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는 어떤 대상을 언어를 통해서 내 안에서 재구성할 때 그것은 비로소 그때서야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을 함의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글은 간결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함의와 철학은 결코 간결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더 중요한 구절은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


ㅡ라는 구절이다. 우리는 노인에게서 한 가지 면만 본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 주름, 약해보이는 할미꽃 같은 그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노인들은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을 가지고 있다.

노인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인을 집단화하여 대상으로 보는 것 역시 하나의 인식론적 폭력이다. 이 위에서의 노인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해도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노인'을 교육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정의했으면 한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노인이란 노화가 진행되면서 신체적, 인지적, 심리적, 사회적 측면의 능력과 기능이 저하되어 개인의 자기 유기기능과 사회적 역할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자로서 60세 이상인 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는 있다.

하지만 사회가 고령화되고 평균 수명이 높아지면서 제도적 측면에서만 노인을 얘기하는 것은 실질적인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바꾸기엔 한계가 있다.

 노인은 동일한 집단이 아니라 성별 계층 연령 등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이는 이질적인 집단이다.












내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다오




그런 점에서 노인에게 글을 읽고 씀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노인문해교육은 노인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교육의 형태이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것들을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강렬한 자기표현의 수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준다.

노인문해교육은 따라서 읽고 쓰는 것을 넘어서 사회 속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하는 것, 나의 삶을 사회에 이야기할 기회를 얻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 좋은 예시가 되는 것이 <보고시픈 당신에게>라는 책과 칠곡할머니서체 프로젝트이다.


<보고 시픈 당신에게>는 전국의 한글학교에서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의 시와 산문 89편을 엮은 책이다. 뒤늦게 글자를 익히면서 느끼는 기쁨과 안타까움, 가족에 대한 사랑, 고단하고 애틋했던 삶이 비뚤배뚤한 몇 줄 작품에 담겼다.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익숙한 이들이 노인 비문해자들의 절절한 사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간단한 메모나 은행 업무는 물론 아이들 공부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쌓인 안타까움과 설움이 가득하다.

글을 몰라 깜깜했던 평생의 이야기다.




항상 배우지 못해서 배운 사이 부러웠어요
시집가서 신랑한테 행복도 받지도 못하고 살았어요
내가 배우지 못해서 한니 맺혔다 지금이라도 배우니 행복함니다
오늘은 공부방에서 공부하니 좋슴니다

_ 보고시픈 당신에게 中「하글 배우고 십다」발췌


 

보고시픈 당신에게 中「겁 안나는 세상」


문해교육은 단순한 ‘문자 습득’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비문해자들은 이제 모임을 만들고 사회 참여에 나선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문해교육은 한을 풀고 자존감을 높이는 과정의 첫 단계다.

반평생 모르고 살았던 ‘꿈’이라는 단어를 찾는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을 본 젊은 세대들의 반응이다.


보고시픈 당신에게 교보문고 리뷰 발췌


반응의 대부분은 공감이다.

오히려 삶이 힘들 때 꺼내보고 싶은 책으로서 평가한다.

이를 보며 부모님, 조부모님을 떠올린다.

노인 비문해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에서야 그들을 존재로 인식한다.

당연한 일이다.


노인문해교육은 노인이 자신을 존재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미 세대 간의 소통의 한 창구를 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노인문해교육의 환경은 열약하며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교사와 기관의 수도 부족한 실정이다. 노인문해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노인들이 사회 속에서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여건과 요구를 파악하고 잠재력과 능력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칠곡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한 '칠곡가시나들'과 할머니들의 '칠곡할매폰트'

'


 

젊은 세대들의 반응 역시 말해 뭐해






1호선 지하철의 냄새는 노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된다. 그리고 지금 노인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고 노인에 대하여 말할 때 이미 그것은 결코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노인은 결국 우리의 미래 자화상인 것이다.


하지만 노인교육은 단순히 노인들의 여가를 충당해 주는 수단이나 사치스런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구조화된 사회적 시선, 그리고 그런 사회적 시선 속에 노출되어 있는 열악한 교육환경, 노인의 심리적 박탈감과 무기력 등 이중, 삼중의 장애물과 만나야 한다.


1호선 지하철의 냄새는 사실 노인이 거기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거기에 있을 수 밖에 없게 한 사회가 만들어낸 냄새이다. 

노인 역시 고유의 잠재력과 능력이 있는 한 존재라는 것을 젊은 세대가 인식하고, 한편으로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능력을 인식하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이 충족된다면 우리의 사회는 향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문해라는 문제는 사실 복잡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얽혀 있는 문제이다.

문제를 문제라고 보는 거기서부터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걸음일 것이다.

노인문해교육의 필요를 인식하고 노인들의 개개인의 요구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노인교육의 시작이 될 것이다.



노인들을 1호선 지하철로, 탑골공원으로, 삶의 소외로 몰아내는 것은 노인 스스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칠곡할매폰트 다운로드 링크와 <보고시픈 당신에게> 책 구매 링크

그리고 직접 노인문해교육 관련 취재를 가서 전해들은 말 한 마디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 칠곡할매폰트 다운로드 링크 : https://www.chilgok.go.kr/portal/contents.do?mId=0404070100


* 책 <보고시픈 당신에게> 구매 링크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39349


* 노인문해교육을 받은 할머님의 말씀

 ‘나는 항상 누구 엄마, 옆집 할머니 이렇게만 살아왔는데 내 이름 석자를 쓸 줄 아니까 나라는 사람이 생기더라. 어딜 갈 때도 누구한테 안 물어보고도 정류소 글씨 보고 가고, 동사무소에서도 나 혼자서도 일도 볼 수 있고, 그러니까 너무 좋았다. 투표를 할 줄 아니까 어떤 후보가 나오는지도 궁금해지고, 정류소 글씨를 볼 줄 알게 되니까 가려던 곳 말고도 어디가 있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할머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내려본 정의는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점


읽고 쓰는 것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한 거겠지?

그렇기에 읽고 쓴다는 것이 주는 권력 역시 나에게는 숨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학교 폭력 없는 학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학교는 실상 학교폭력을 덮어놓는 학교라고들 한다. 말이 현상을 가두고 말을 막는다.

‘문맹률 7%’라는 슬로건 아래 제도권 내의 공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은 세대로서 좁은 경험으로 멋대로 구획해놓은 ‘우리’에게는 문맹이라는 것은 고민해보지 못한 문제일 테지만,

4차 산업 시대를 바라보는 사회에서 4차 산업 시대라는 글자조차 못 읽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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