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급준비율의 비밀
우리는 은행을 거대한 금고라고 상상한다. 내가 100만 원을 예금하면, 은행 직원이 내 이름표가 붙은 금고에 100만 원을 고이 넣어두고 문을 잠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금고의 문을 열어 돈을 꺼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은행은 보관소가 아니다. 은행의 본업은 돈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굴리는 것이다. 당신이 100만 원을 입금하는 순간, 그 돈은 더 이상 은행 금고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돈은 즉시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되어 은행 밖으로 나간다.
만약 모든 예금자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은행으로 달려가 "내 돈 돌려주세요"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절대로 그 돈을 다 돌려줄 수 없다. 애초에 그 돈은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챕터에서는 은행이 합법적으로 당신의 돈을 비워두는 시스템, 즉 지급준비제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마법인 신용창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자본주의 은행 시스템의 핵심 규칙 중 하나는 바로 지급준비제도이다. 한국은행의 <경제금융용어 700선>에 따르면, 이는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지급준비금 적립대상 채무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예치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이다.
쉽게 말해, 은행은 고객이 맡긴 돈의 전액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법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비율, 즉 지급준비율만큼만 남겨두면 나머지 돈은 마음대로 대출해 주거나 투자해도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지급준비율이 10%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1억 원을 예금하면 은행은 그중 1,000만 원만 금고(또는 중앙은행 계좌)에 남겨두고 나머지 9,000만 원은 A라는 사람에게 대출해 준다. 당신의 통장에는 여전히 '1억 원'이 찍혀 있지만 실제 은행 금고에는 1,000만 원밖에 없다. 나머지 9,000만 원은 이미 은행 밖으로 사라진 뒤다. 우리가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기는 동안 은행은 이 부분 지급준비 시스템을 이용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이 지급준비금만 남기고 대출을 해주는 과정이 반복되면, 경제 전체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실제 존재하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시중에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파트 2에서 신용창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는 그 과정을 복기하며 지급준비제도를 이해해 볼 것이다. <경제금융용어 700선>에서는 신용창조를 은행이 예금과 대출 업무를 반복적으로 취급하는 과정에서 예금통화가 창출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아래 과정을 따라가 보자.
1. 당신이 A은행에 100원을 예금한다. (A은행 현금: 100원)
2. A은행은 10%(10원)를 남기고 90원을 B에게 대출해 준다.
3. B는 그 90원으로 물건을 사고, 판 사람 C는 그 돈을 다시 B은행에 예금한다. (B은행 현금: 90원)
4. B은행은 다시 10%(9원)를 남기고 81원을 D에게 대출해 준다.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면 처음에 있었던 현금은 100원뿐이었지만, 시중 은행들의 장부에 찍힌 예금 총액은 1,000원에 육박하게 된다. 즉, 900원이라는 돈은 은행 시스템이 만들어낸 숫자이자 신용일뿐, 실물로 존재하는 돈이 아니다. 우리가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차를 살 수 있는 것은 은행이 이처럼 '없는 돈'을 만들어내어 빌려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팽창할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이 텅 빈 금고에서 나오는 마법, 신용창조 덕분이다.
뱅크런은 사고가 아니라 필연이다 하지만 이 마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은행이 위험하다"라고 생각해서 한꺼번에 예금을 찾으러 은행으로 몰려가는 현상을 뱅크런(Bank Run)이라고 한다.
은행은 구조적으로 고객의 돈을 다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뱅크런이 발생하면 아무리 건실한 은행이라도 파산할 수밖에 없다. 지급준비율이 10%라는 말은 전체 예금자의 10% 이상이 동시에 돈을 찾으러 오면 은행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뜻과 같다. 뱅크런은 경제 위기의 심화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이다. 이는 은행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급준비제도라는 시스템 자체가 가진 태생적인 불안정성 때문이다.
이처럼 당신의 돈은 은행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지 않는다. 은행은 당신의 돈을 지렛대 삼아 끊임없이 부를 팽창시키는 거대한 공기 펌프이다. 이 펌프는 경기가 좋을 때는 부라는 풍선을 화려하게 부풀리지만 부피가 커질수록 작은 바늘 하나에도 순식간에 터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줄 요약>
1. 은행은 고객 예금 전액을 보관하지 않고 법적 최소 비율인 지급준비금만 남긴 채 나머지는 대출 등으로 운용한다.
2.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대출해 주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시중 통화량이 늘어나는 것을 신용창조라고 한다.
3. 은행은 구조적으로 모든 예금자의 돈을 돌려줄 수 없으므로, 신뢰가 깨져 대량 인출 사태(뱅크런)가 발생하면 파산할 위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