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남편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올해 95세 노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75세 아들과 79세 며느리, 64세 딸, 쉰 가까운 손녀와 마흔이 된 손자가 마지막을 지켰다.
남편이 가장 슬퍼했다. 남편은 태어나서부터 초등 졸업할때까지 외할머니하고 단둘이 살았다. 남편은 자기 어릴적 기억은 모두 외할머니라고 했다. 외할머니가 엄마 같은 존재라고. 엄마는 다 커서 만났지만 아직도 서먹서먹하다고.
나는 13년전에 남편 외할머니(노할머니)를 처음 뵈었다. 내가 기억하는 노할머니는 정신은 또렷하시지만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이었다. 걸음도 못걷고 화장실도 못가시고 물 한잔 스스로 떠먹기 힘들어 하셨고 집 창문도 못 여시고 우리 시어머니가 수족이 되어 모든것을 다해주셨다. 우리 시어머니도 건강이 여의치 않으셔서 간병에 짜증나고 지쳐 계셨다. 요양원이든 방문요양보호사든 이용을 하면 좋겠는데 딸 손길 빼고는 아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착한 효녀 시어머니는 다 맞춰서 지극정성 간병을 했다. 본인 신세한탄을 들어야 하는것은 나와 남편 몫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는 손주를 셋이나 두었지만 정작 본인 어머니 간병하느라 손주들하고 시간보내기 힘들었다. 뭐라도 할라치면 노할머니가 아프다고 호출을 했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병원행이었다.
우리가 프랑스에 이민왔을 때 막 퇴직한 우리 시어머니는 우리집 바로 앞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요양원에 절대 안간다는 노할머니를 그 집에 모셨다. 산소호흡기 콧줄과 기저귀 수발을 하면서 우리 시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에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 얼굴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노할머니보다 시어머니가 더 걱정이 되었다. 남편은 다섯식구 먹여 살린다고 직장일에 매진해야 했고 나는 갓난쟁이 비롯해서 애 셋 뒤치닥거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고작 할수 있는건 식사준비할때 좀더 챙겨서 시어머니 도시락을 싸서 드리는 정도였다.
그러다 시어머니가 당장이라도 지쳐떨어질것 같은 모습을 보고 겁이 났다. 이대로는 안될것 같았다. 나든 남편이든 돌아가면서 간병을 해야지 안그러면 시어머니 큰일나겠다 싶었다. 식사수발은 그러려니 하는데 기저귀가 걱정이었다. 비위가 거슬리진 않았다. 애를 셋 키운 엄마니까 똥기저귀는 차고 넘치게 봤다. 그것보다 나보다 몸무게가 두배는 더 나가는 노할머니 기저귀는 어떻게 갈지 엄두가 안났다. 막내는 어린이집도 안가서 그마저도 막내를 업고 노할매를 돌봐야 될 판이었다.
남편은 이 사태에 단단히 화가 나서 총대를 맸다. 당장 요양원에 가야 한다고. 그게 노할매를 위한거고, 엄마를 위한거고, 자기를 위한거고, 손주들을 위한거라고. 지금 노할매는 집에서 모실 수준이 아니고 환자라고, 한바탕 큰 소리가 났다.
결국 노할매는 요양원에 갔고 그래도 시어머니는 거의 매일 음식을 싸들고 보러 가셨다. 노할매한테 시어머니가 필요한건지, 시어머니한테 노할매가 필요한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서야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여유있게 웃는 모습을 봤다.
서너달이 지나고 노할매는 노환으로 여기저기 합병증이 왔고 임종을 준비하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남편은 일하는 시간 빼고는 거의 매일 노할매를 보러 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 임종을 지켰다. 나는 집에서 애들을 돌보고 일상을 꿋꿋이 지켰다. 남편이 그러기를 바랬다. 남편은 죽음과 슬픔이 우리 애들을 집어 삼키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남편 몫까지 하며 애들하고 일상을 보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눈물이 났지만 담담했다. 예전에 한국 시골마을에 살 때 돌아가시는 것을 차고 넘치게 봤다. 앞집 옆집 뒷집으로 다 돌아가셨다. 노인들은 계절 바뀌면 훅 돌아가신다는걸 알았다. 아기도 불쑥 생겨서 태어나듯이 노인들도 나이들면 불쑥 돌아가신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예전 어릴때는 죽음이 너무 멀리 있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마흔이 가까우니 인생 절반쯤 살았으니 죽는게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고보면 죽어가는거나 살아가는거나 매한가지다. 어차피 죽을텐데 살아있는동안 재미있게 살다 가고싶다.
마지막으로 노할매의 영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