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시절을 함께한 칠곡
우리의 신혼집은 칠곡IC 바로 옆의 20살이 넘은 구축 아파트였다. 결혼 전까지 성서에 살았던 내 기준에서 이 동네는 칠곡의 초입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칠곡 1지구라고 한단다.) 신혼집이 있는 아파트 바로 옆에는 관음운동장이 있었다. 동네 근린공원인 관음공원을 끼고 있는 이 운동장에는 한 바퀴에 400m 남짓한 우레탄 트랙이 깔려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조깅이나 걷기 운동을 하기 좋았다. 트랙이 지겨우면 관음공원 산책길을 걸으면 그만이었다. 2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해가 진 후에도 따뜻함을 머금은 바람이 사랑스러운 시절이었다. 우리는 운동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밤마실을 시작했다.
날씨가 괜찮은 날이면 우리는 저녁을 먹고 바로 밖으로 나섰다. 무릎이 아프기 직전까지 트랙을 뛰거나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쉬워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기도 하고 그네를 타기도 했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면 밤하늘은 쨍할 정도로 깨끗했고 다문다문 별이 보였다. 나는 그전까지 밤하늘을 오랫동안 올려다 보는 사람이 아니었고 별자리에도 어두웠었다. 여기에서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북두칠성과 북극성, 카시오페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칠곡의 밤하늘은 깨끗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결혼 직전까지 살았던 성서의 공기와는 맛깔부터 달랐다. 공장이 밀집해 있는 성서의 공기는 늘 흐린 회색이었고 비가 오거나 바람의 방향이 잘못 들어맞는 날에는 와룡산 쓰레기매립장에서 날아오는 정체모를 냄새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 성서에서 학생 시절, 사회 초년생 시절을 보냈으니 밤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시골이 아니지만 시골처럼 상쾌한 칠곡의 밤을 사랑했다.
칠곡의 밤은 결혼 전 한 번 제대로 맞이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결혼 전 마지막 연말연시를 북구어울아트센터에서 기념하기로 했다. 이곳은 관음운동장 바로 옆에 있어 우리의 신혼집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에서 해마다 연말 공연을 하고, 해넘이 카운트다운 행사로 불꽃놀이를 한단다. 신혼집은 시댁과 같은 아파트단지에 있었고, 남편도 중학교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칠곡에서 살아 왔었다. 그는 이 행사를 유심히 지켜보다 드디어 함께할 사람을 찾은 듯했다. 연말 공연으로 잡힌 음악회 시작 시간은 밤 10시였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후 어정쩡한 시간을 카페에서만 죽이자니 지겨웠다. 날이 춥긴 했지만 우리는 저녁 먹은 것을 소화할 겸 운암지를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운암지는 북구어울아트센터에서 차로 5~10분 거리에 있었다. 함지산 자락 끄트머리에 위치한 운암지의 겨울은 휑했지만 계절과 별개로 산책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공원을 끼고 있어 잠시 다리를 쉴 만한 벤치가 많았고, 바로 아래 카페의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함지산과 운암지가 훤히 내려보이는 풍경은 일부러 찾아가는 교외 카페의 풍경과 꼭 닮아 있었다. 운암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칠곡 먹거리 타운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다문다문 있었고, 칠곡에서 (풍성한 밑반찬으로) 제일 유명한 횟집인 삼거거리횟집도 있었다. 연못가를 지나 공원으로 들어가면 함지산을 등반할 수 있는 등산로의 시작 지점도 있었고, 유아숲생태원도 있었다. 우리는 이때만 해도 추위를 핑계로 서로에게 꼭 붙어 산책을 했지만, 몇 년 뒤에는 딸아이를 데리고 유아숲생태원을 찾아 오기도 했다.
운암지의 차가운 공기를 실컷 쬐고 따뜻한 공연장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졸음이 노곤노곤 밀려 왔다.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은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다. 심신이 살짝 지겹다 싶을 때쯤 공연이 끝났다. 카운트다운 행사까지는 채 30분이 남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발을 맞추어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풍선을 나뉘어 주고 있었다. 나도 어린아이처럼 풍선을 하나 받았다. 드디어 자정, 2016년이 밝았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깨끗하고 쨍한 칠곡의 밤하늘 위를 소박한 불꽃놀이가 장식하는 모습은 내가 현재까지 기억하는 칠곡의 풍경과 꼭 닮아 있었다. 따뜻하고 소박하며 볼만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의집 어린아이가 풍선을 받지 못해 울상인 걸 보고 내 풍선을 건네 주는 것으로 칠곡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새해 행사를 마무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해마다 북구어울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새해맞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를 가질 계획은 없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신혼집에서 지낼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낡은 구축 아파트 내부를 오랫동안 고민해 우리의 취향대로 수리했었다. 그 신혼집에서 채 1년을 살지 못하고 다시 연말연시를 보름 앞둔 날 성서의 친정 바로 옆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친정어머니께서 곧 태어날 아이의 육아를 적극 도와주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칠곡에서 살던 기간은 신혼 시절과 완벽히 일치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칠곡은 더욱 살기 좋은 곳이었다. 관음운동장 트랙을 뛰는 것이 지겨울 때면 우리는 조금 더 걸어서 팔거천으로 향했다. 팔거천은 신혼집에서 걸어서 20분~30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팔거천을 지나면 칠곡에서 제일 번화한 3지구 거리가 나타났다. 칠곡을 관통하는 지상철인 3호선은 팔거천을 따라 흘렀다. 네모반듯한 아파트 단지와 도로, 그 사이에 마지못해 서 있는 근린공원과 쓰레기매립장을 끼고 있는 와룡산만을 곁에 두고 반평생을 살아왔던 나에게 팔거천의 풍경은 작은 충격이었다. 팔거천은 꽤 넓었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청둥오리가 둥둥 떠다니는 곳이었다. (가끔 수달이 발견되기도 한단다.) 아지가지하게 꾸며놓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도 재미있었고 둔치의 잔디밭과 나무와 벤치도 깔끔했다. 주말 한낮에는 왕발통을 빌려 산책하기도 했다. 산책을 마치면 곧장 3지구로 넘어가 둘이서 맥주 한 잔 마시는 것도 참 재미있었다. 가벼운 취기를 느끼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참 재미있었다. 봄이면 시냇길을 따라 개나리와 벚꽃이 만개했고 그 위로 지상철이 흘렀으며 하늘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답지 않게 깨끗했다. 팔거천 잔디밭에서는 평일 저녁마다 맨손체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마 강사는 주민센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늘 그렇듯 남편과 저녁 산책을 하다 홀린 듯 맨손체조 행렬에 동참해 몸을 움직여 본 것도 웃음 나오는 추억이 되었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근무지도 종전의 성서에서 칠곡으로 이동해 발령을 새로 받았다. 칠곡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 교사들의 대부분은 칠곡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신규 선생님들 중에는 대구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꽤 많았다. 칠곡은 도심에서 멀지만 아파트가 많고 학교도 많아 발령을 낼 자리도 많았다. 도심에서 멀기 때문에 자연히 칠곡 사람이 아니면 근무를 희망할 일이 없었고 따라서 신규 발령 비율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도심에서 칠곡으로 들어가려면 국우터널, 팔달교, 매천대교 중 하나를 반드시 지나야 한다. 국우터널과 매천대교가 생기기 전, 칠곡에 발령을 받으면 '눈물의 팔달교'를 지나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칠곡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도 막연히 변두리 지역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칠곡 출신인 남편은 칠곡을 무척 사랑했다. 새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는 칠곡의 선생님들도 하나같이 칠곡을 사랑했다. 어느 정도의 편의 시설을 잘 갖추고 있어 살기에 불편함이 없다는 이유를 첫손으로 꼽긴 했지만, 그들의 칠곡 사랑에는 살기 불편하지 않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비록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칠곡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칠곡에서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근무하며 칠곡 사람들의 그 마음에 미묘하게 동화되어 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나이가 되면서 우리는 성서를 떠나 아이 키우기 편하고 친정 부모님의 본가 근처인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칠곡에서만 살아온 남편도 성서에서만 살아온 나도 인생의 초점이 온통 아이에게 맞춰지면서 아이 키우기 편한 이 동네에 빠르게 적응을 했고 새로운 동네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이사와 함께 발령을 동네 근처로 받게 되면서 칠곡은 빠르게 추억 속의 삶터로 잊혀 갔다. 추억 속의 칠곡을 다시 떠올려 본 것은 주말에 아이와 데이트 겸 나선 신전뮤지엄 덕분이었다. 칠곡 IC 바로 옆에 있던 대형 마트가 폐점된 후 오랫동안 폐허처럼 있던 자리에 생긴 곳이 바로 신전뮤지엄으로, 신전떡볶이 본사 겸 유료 전시 및 체험 공간이 되었다. 신전뮤지엄 맞은 편에는 우리의 신혼집이 있던 그 아파트 단지가 그대로 서 있었다. 아이와의 신전뮤지엄 데이트는 우리의 신혼 시절처럼 소박하지만 즐거웠고 화려하지 않지만 달콤했다. 우리의 시간은 많이 달라졌지만 칠곡은 우리들의 추억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고, 촌스럽지 않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의 인스타그램에 있던 추억의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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