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일주일 만에 계절이 바뀌었다. 위세를 부리던 무더위가 물러가자 서늘한 바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길을 나서면 아침저녁으로 차가워진 공기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속이 비면 마음도 허전한 법. 바람이 차면 따뜻한 국물이 떠오르고 그럴 때면 나는 즐겨 찾는 밥집으로 향한다. 그 집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주에서 수제비를 제일 맛있게 끓이는 집이다.
예전엔 그에 견줄 만한 집도 있었지만 이곳을 알게 된 뒤로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찾는다. 사실 더 많이 갈 때도 있다. 그 집의 뜨끈한 국물만 떠올려도 절로 미소가 번진다. 오늘도 그 집에서 수제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한옥마을로 들어섰다.
수제비집을 나와 남천교를 건너면 바로 한옥마을이다. 해질 무렵, 남천교에서 바라보는 전주천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한때 매일 나가서 사진을 찍어 두면 어쩔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밤이 코앞이다. 낮 동안 부산했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줄어들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는 마음이 설렌다.
나는 낮에 만나는 한옥마을보다 밤에 만나는 한옥마을이 이백 배는 좋다. 밤으로 향하는 한옥마을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느낌을 준다. 가끔은 골목길 어귀에서 물끄러미 서서 자그마한 불빛에 몸을 맡기고 오랫동안 쳐다보기도 한다. 고즈넉한 침묵에 싸인 골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도시에 산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더 마음에 들면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거나 넋을 잃고 쳐다본다. 이럴 때면 굳이 골목을 걷지 않아도 그 근처만 가도 기분이 좋아진다. 도심이나 아파트에선 느낄 수 없는 여유와 느긋함, 온전함이 그 골목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나만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아니다. 어느 해인가 아들은 한옥마을과 베네치아의 골목길과 비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사라진 밤의 한옥마을은 비로소 본래의 숨결을 드러낸다.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는 낮이 사라진 대신 고즈넉함과 웅숭함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덕분에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고 느긋해진다. 그 길을 걷고 있노라면 내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게 축복처럼 여겨질 정도다. 당일치기로 전주에 왔다가 돌아가는 이들로서는 이 매력적인 풍경을 구경도 못하고 가는 셈이다.
밤의 전주를 보지 못한 이들은 전주의 매력을 절반도 맛보지 못한 셈이다. 어떤 때는 서둘러 돌아가는 이들을 붙잡고 전주의 밤이 주는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아껴두고 즐기듯 전주의 진짜 매력을 홀로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2023년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 숫자는 15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외국인도 60만 명이 넘게 이곳을 찾았다. 숫자만으로도 전주의 인기를 실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한옥마을에 가면 무서울 정도로 관광객이 많기는 했다. 이제 전주는 한해에 천만 명이 넘는 이들이 찾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로 손꼽힌다. 사람들을 만나 보면 전주에 대한 위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전주에 살면서 속상한 일도 있다. 그중 으뜸은 두세 시간 만에 전주를 평가하는 이들을 만날 때다. 좋은 평가도 많지만 “에이 뭐 별로 볼 것도 없고만 이런 데를 오자고 그랬어.”라는 식의 불만 섞인 표현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속상한 것을 넘어서 화가 난다.
그 말속에는 자신이 기대했던 전주와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부분은 한옥마을일 테지만 그가 만난 전주의 몇 시간은 어땠을까? 아마 한참 줄을 서서 꼬치나 주전부리를 사고 경기전과 전동성당을 포함한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비빔밥 먹는 게 전부 아니었을까?
최근 체류시간이 늘기는 했지만 한때 전주는 스쳐 지나가는 도시, 당일 여행이 가능한 도시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다 보니 전주에 오면 으레 찾는 한옥마을에 머무는 시간 역시 몇 시간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두 시간 만에 그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로서는 그럴 방법이 없다. 그런 재주도 없으며 그 방법을 알지도 못한다.
그동안 여행작가로 살며 스쳐 지나간 일정을 잡은 탓에 후회로 남은 도시들이 있었다. 어떤 곳은 오랫동안 동경한 곳도 있고 전혀 예기치 않고 방문한 곳도 있다. 잠시 머물렀던 곳일수록 더 오래 그리움이 남았다.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보거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때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끔 힘들고 지칠 때 거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곳일수록 더 아쉬운 법이다. 사람들에게 전주는 어떤 이미지일까 궁금하다. 전주를 찾는 사람들은 전주에서 얼마쯤의 시간을 보낼까? 아마 몇 시간, 길어야 반나절 그 정도가 아닐까? 아마 사람들은 전주가 하루 묵기는 좀 그렇고 당일치기는 서운한 그런 도시라고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주에서 방문하는 곳도 대개는 한옥마을에 집중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전주는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전주에서는 바삐 걸으면 그만큼 놓치는 것이 많다. 몇 시간 봐야겠다고 조급히 마음먹고 전주를 찾는 이라면 다음에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아껴 두시라. 봄햇살을 마주하며 경기전도 둘러보시고, 100년 넘은 전동성당의 따사로움도 맛보시려면 조금은 더 전주에 시간을 투자하실 필요가 있다. 해질 무렵 전주천변도 걸으시고 피곤하면 앉아서 세월이 흘러가는 구경도 하시라. 소문난 전주 맛집은 덤이다.
만약 낮의 전주만을 보고 가셨던 분들이라면 밤의 전주를 꼭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한밤중 달빛을 받으며 싸드락싸드락 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당신도 전주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그러니 전주에 오시거들랑 조금만 가는 발걸음을 늦추시라. 왜냐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전주의 진짜 모습은 해질 무렵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