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교에 관하여

by 이문상

사구교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無善無惡是心之本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념의 발동이며[有善有惡是意之動],

선악을 아는 것은 양지이고[知善知惡是良知],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이다[爲善去惡是格物].


이 네 구절은 正心·誠意·致知·格物과 관련이 있다. 즉 사구교는 <대학> 8조목 중 네 조목을 풀이한 것이다. 사구교가 왕양명이 죽기 바로 전에 제출되었다는 측면에서 치양지와 함께 양명의 사상을 집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치양지와 일맥상통하는 사상으로 연결해 볼 수 있다. 사구교의 각 구절마다 善·惡을 명기한데서 알 수 있듯이, 양명이 사구교를 제출할 때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양명 자신이 사구교가 초학자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듯이, 사구교는 흠잡을데 없는 사상으로 생각했다.


1. 無善無惡是心之本體(무선무학심지본체 -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은 본래 선도 없으면 악도 없는 것이다. 심체가 無善無惡하다는 것은 다음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무선무악은 상대적인 선악개념을 초월한 심체의 절대지선함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적인 의미의 선이나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단계, 즉 논리적으로 선악이 갈라지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 무선무악은 반드시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 경향성을 내재하고 있다.

양명은 “지극히 선한 것은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의 본체에 어찌 선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또 “지극한 선이란 본성이다. 본성은 본래 조금의 악도 없기 때문에 지극한 선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마음이 본래 지극히 선함을 말하고 있다. 마음의 본체는 지극히 선하기 때문에 심체 상에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다만 내 마음의 본체가 일체 도덕적 행위의 근원임을 자각하는 공부만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양명은 “이제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본체의 어느 곳에서 공부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마음이 발동한 곳이라야 비로소 힘을 기울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마음을 어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發하는 의념을 바르게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구절에 대해 양명은 본성의 본체는 원래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인데, 발하여 작용하는 데서는 원래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말류의 폐단에서는 원래 일정한 선이 되거나 일정한 악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뜻에 의하면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 모두 한쪽 측면에서만 바라본 것이 된다. “맹자가 말한 본성은 직접 근원으로부터 말한 것이며, ···순자의 성악설은 말류의 폐단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물론 “맹자는 근원으로부터 본성을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원에서 철저히 이해하는 데 힘쓰도록 했지만, 순자는 말류의 폐단으로부터 본성을 말했기 때문에 공부가 다만 말류에서 구제하여 바르게 하는데 있었으므로 힘을 허비하게 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무선무악심지체’란 말은 인간이 원래는 ‘무선무악’했다는 의미이다. 이 ‘무선무악’한 마음은 양명에게 있어서 ‘양지’를 의미하며, ‘무선무악’의 경지는 곧 聖人의 경지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 위해 공부하므로, 공부는 이 ‘지선’의 경지에 도달 혹은 회복하기 위한 공부가 된다. 도덕 교육에서 본다면 성인은 바로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며, 도덕 교육은 성인을 키우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2. 有善有惡是意之動(유선유악시의지동 -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념의 발동이다)

본래 본성의 본체는 ‘무선무악’하지만 ‘뜻[意]’에 의해 ‘선’과 ‘악’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뜻을 성실히 하는[誠意]’ 공부가 필요하다. ‘성의’ 공부는 생겨나는 악을 자르고 선을 키워 나가는 공부이다.

양명의 초기 사상에서는 ‘성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의 8조목 중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성의’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중용>에서 말하는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다’는 것과 <대학>의 ‘밝은 덕을 밝힌다’는 공부는 다만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뜻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는 다만 물을 바르게 하고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만약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중심으로 물을 바르게 하고 양지를 실현하는 공부를 한다면 공부가 비로소 결실이 있게 된다. 즉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뜻을 성실하게 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양명의 입장에선 ‘격물치지’를 보충해서 <대학장구>를 만들 필요가 없다. ‘성의’가 중심이 되어 ‘격물치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념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대학>의 공부는 다만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뜻을 지극히 성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극한 선[至善]이다.” 지극히 선한 마음이 발한 것이 의념이라고 한다면, 의념도 역시 지극히 선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은 바로 사욕이나 물욕 때문이다. 그래서 양명은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바르지 않음이 없으나, 그 의념이 발동한 뒤에 바르지 않음이 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의념이 발한 것에 나아가 바로 잡아야 한다.라고 하여, 사욕과 물욕을 제거해야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正心은 바로 誠意 공부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다만 뜻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 속에서 자신의 심체를 체인하는 것이다. 항상 거울처럼 텅비어 있고 저울처럼 공평해야 한다.


3.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약시양지-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다)


양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사람은 양지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다. 양명은 양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음은 몸의 주재이며, 마음의 虛靈明覺이 이른바 본연의 양지이다. 허령명각의 양지가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을 의념이라 한다. 양지가 있는 뒤에 의념이 있고, 양지가 없으면 의념도 없으니, 양지는 의념의 본체가 아니겠는가?


즉 양명은 양지가 없으면 의념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치양지를 통해 성의 공부를 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의’공부는 ‘치지’부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양명은 의념이 발하는 데 선이 있고 악이 있으니, 그 선과 악의 구분을 밝히지 않으면 또 참과 거짓이 뒤섞여서 비록 성실하고자 하더라도 성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는 것은 반드시 치지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치지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을 넓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자께서 자공에게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하나로 관통하였다.”라고 한 말처럼, 치지는 ‘많이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다. 양명에게 있어서 知는 良知를 의미한다. ‘致知’는 ‘致良知’이고 이는 곧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여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오직 그 양지가 아는 것을 실현하는 데 있다.” 善인줄 알고도 行하지 않거나, 惡인줄 알고도 行한다면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양지가 알고 있는 대로 행해야만 참으로 성실해 질 수가 있는 것이다.


양지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양지를 자각하여 실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聖人과 凡人으로 나뉘게 된다. 성인은 양지를 자각하여 실현시킬 수 있는 반면, 범인은 양지를 가리우는 사욕 때문에 양지를 실현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 때문에 치지 공부가 필요하다. 致의 의미는 擴充과 復이 있음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치지 공부가 중요하다고 하여 치지 공부만으로 공부를 이룰 수 없다. 바로 격물 공부와 같이 해야 한다.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뜻에 막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앎을 실현하고[致知] 의념을 바로잡는[格物] 공부를 해서 사사로움을 이기고 천리를 회복해야한다.”

치지 공부와 격물 공부는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로서 공부할 때 잠깐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다. 양명에게 안의 일과 밖의 일은 나누어지지 않고, 마음과 일 또한 나누어지지 않는다.


4. 爲善去惡是格物(위선거악시격물 -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이다)


치지 공부는 격물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양명은 “치지는 반드시 격물에 달려있다.”라고 하여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도 “致知在格物”이라든가, “物格而后知至”라는 말이 있어 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格物의 “格이란 바로 잡는다”이고 “物이란 일이다.” ‘바로 잡는다’는 것은 부정한 것을 바로잡아 바른 것으로 돌이키는 것으로, 이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朱子는 ‘格物’을 ‘窮理’로 이해하고 있다.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에도 모두 이치가 있다.”는 주자의 말에, 양명은 “설령 풀과 나무를 궁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돌려서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세상 사물을 모두 궁구 할 수 없을 뿐더러 만약 궁구한다고 해도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할 수 없으니 소용없다는 의미이다.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른바 정해진 이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을 사용하여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는 것으로,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마음과 이치는 둘로 나눌 수 없으며, 나누려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양명에게 치지격물은 “내 마음의 양지를 각각의 사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가 바로 이른바 천리이다. ···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치지이고, 각각의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것이 격물이다.” 양명에게 마음과 이치는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며, 하나로 합해져야 한다. 이러한 설이 심즉리이다.


주자의 卽物窮理에 대해, 양명은 만약 ‘격물’이 ‘궁리’라면 성인이 “致知在窮理”라고 말했을 것인데, 그런 비뚤어지고 불완전하게 표현할 리가 없다고 말한다. 양명에게 있어서 궁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格·致·誠·正을 겸하여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리를 말하면 格·致·誠·正의 공부가 모두 그 가운데 있다. (그러나) 격물을 말할 때는 반드시 치지·성의·정심을 함께 제시한 뒤에야 비로소 공부가 온전하고 엄밀해진다. 지금 격물 하나만을 거론하면서 그것이 곧 궁리라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궁리를 앎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격물에는 아직 행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양명의 지행합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양지가 알고 있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더라도, 의념이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면, 의념은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양지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을 일[事]에 실제로 행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물은 바르게 되지 않음이 없으며, 나의 양지가 아는 것은 이지러지거나 모자라거나 막히거나 가리는 것이 없어서 그 지극함을 다할 수 있게 된다. 대저 그런 뒤라야 내 마음에 남은 유감이 없이 상쾌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며, 대저 그런 뒤라야 의념이 발한 것이 비로소 스스로 속임이 없어서 성실하다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격물을 통해 치지·성의·정심이 이루어진다. 격물의 중요성은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일에서 그 양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바로 격물”이기 때문이다.


무릇 정심·성의·치지·격물은 모두 수신의 방법이다. 그러나 격물이란 그 힘쓰는 것을 실제로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격물이란 그 마음의 사물을 바로잡는 것이며, 그 의념의 사물을 바로잡는 것이며, 그 앎의 사물을 바로잡는 것이다. 정심이란 그 사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성의란 그 사물의 의념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치지란 그 사물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격물은 마음공부일 뿐이다. 물을 마음이 실려있는 일로 보는 ‘物卽事’에서 성의와 격물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의념의 본체가 바로 지이고, 의념이 있는 곳이 바로 물이다. 만약 의념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이는 “마음 밖에 물이 없다. 내 마음에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격물은 일을 바로 잡는 것이며, 또한 바로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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