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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란 무엇인가

by 이문상

1. 들어가는 말


유학이란 말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거나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논어의 첫번째 學而篇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마지막 편인 堯曰篇의 마지막 구절인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無以立也 不知言無以知人也’를 통해서 유학의 핵심이 무엇이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공자의 어록이라 일컬어지는 『논어』 첫머리에 학습(學習)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학습(學習)이라고 한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정보와 지식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게끔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과연 이것만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행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때때로 익힌다는 것일까?


또한 공자는 쳔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君子)가 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군자(君子)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즉, 유학의 핵심은 배우고 익히는 행위를 통하여 도덕적・인격적인 이상형인 군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므로 유학의 정의는 평범한 ‘소인’이 자기의 내면 수양과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궁극적으로는 이상적 인간인 ‘군자’가 되기 위한 ‘군자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유학의 기원


우선 유학이란 단어의 의미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유가나 유학 또는 유교라는 단어의 유(儒)’자는 옛 전적 가운데 『논어』「옹야」篇에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너는 君子儒가 되고 小人儒가 되지 말라”한 말에서 처음 등장한다. 『설문해자』에서는 “유는 부드럽다(柔)는 뜻이다. 술사(術士)를 가리킨다.”고 풀이하였다. 장병린(1868~1936, 중국 청말 민국초의 고증학자)은 「원유(原儒)」에서, ‘유’는 ‘수(需)’자에서 온 것이며 비가 오기를 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술사(術士)’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하였다.


비가 오기를 비는 술사(術士)는 당시의 지식인 계측으로서 대부분 귀족에 속하였고 이들 가운데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왕조나 제후국에서 太史・ 師保・ 祝史・ 家宰 등의 벼슬을 담당했다.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각기 지방으로 흩어져 도덕과 학문・ 기예를 가르치며 부업으로 지방의 예를 관장했다.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 은나라 선비들은 대체로 이러한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갔는데 공자가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소인유(小人儒)’라고 한 것이다.


공자가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민간의 스승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스스로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배우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가이 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쳤으며, 당시 최고의 학문인 『시(詩)』,『서(西)』,『예(禮)』,『악(樂)』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인(仁)의 철학을 주창했다. 이로써 예를 주관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은나라 선비인 ‘소인유(小人儒)’과는 다른, 자신을 세움으로써 남을 세우며 자신을 완성함으로서 만물을 완성해 가는 ‘군자유(君子儒)’의 개념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고 이로부터 진정한 유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3. 유학의 시대구분


유학의 시대구분을 하는데 여러 관점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기만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즉 선진유학, 한당유학, 송명유학 이 세 시기만의 특징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1) 선진유학

진나라 중원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 확립되었던 유학을 ‘선진유학’라고 하는데 ‘유학’의 실질적 창시자인 ‘공자’, 그리고 공자의 게보를 잇는 ‘맹자’와 ‘순자’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의 유학을 말한 것으로 ‘원시유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공자는 요(堯), 순(舜), 우(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등의 성왕(聖王)들의 가르침을 계승함과 동시에 『시경』,『서경』을 핵심으로 하는 주대(周代)의 전통적 문화를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는 인간론으로 해석하면서 유학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다.


선진 유학에서 주로 다루었던 사상적 내용은 크게 심성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로 양분될 수 있는데, ‘충(忠)’과 ‘서(恕)’가 심성과 관련된 개념이라면,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도덕적 실천능력인 ‘인(仁)’를 갖춘 개인이 사회적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개념이다.


2) 한당유학

중국의 통일제국 한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무제는 국가의 장기적인 존속여부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독존유학(獨尊儒學)’이라는 것을 표방하면서 중국역사상 최초로 ‘유학’이 국가이념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유학은 국가 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진나라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잃어버렸던 유교 경전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결과로 경학이 발달하였고, 『주역』,『시경』,『서경』,『예기』,『춘추』등에 대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술적 풍토에 따라 발견된 고서(古書)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를 금고(今故)논쟁이라 한다. 여기서 ‘금(今)’은 문자 하나하나에 매달리지 않고 전체적인 뜻을 파악하는데 의미를 두는 학파를 말하며, ‘고(故)’는 발견된 고서들을 훈고학적 측면에서 의의를 두고 연구하는 학파를 말한다.


또한 이 시기의 유학은 선진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를 보편적 인간상으로 추구하지 않았으며 이를 대신하여 정치적 지배자인 ‘황제’나 ‘천자’를 보편적 인간상으로 추구하였다. 이는 한당유학이 ‘선진유학’이나 ‘원시유학’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 본성과 주체성을 억압하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의 지배이데올로기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송명유학

이 시기 유학은 당제국의 영향으로 인해 ‘불교 코스몰로지(불교 우주론)’가 융성한 상태에 있었다. 당이 쇠퇴하던 시기에 살았던 한족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외래사상이라 할 수 있는 불교는 극복의 대상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불교를 대신할 사상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관심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유학’이었다. 하지만 유학은 도덕적 실천학이자 통치학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화려한 ‘불교 코스몰로지(불교 우주론)’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느낌이었다. 세련된 ‘불교 코스몰로지’를 누르고 시대의 이념으로 유학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결국 ‘유교 코스몰로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당시 사상가들이 하게 되었는데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북송(北宋)의 정호(鄭顥)와 정이(鄭伊) 형제였다. 이들은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밖에 주염계(周濂溪), 장재(張載), 소강절(邵康節) 등이 인간 심성론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론을 펼쳤으며 이러한 사상을 남송(南宋)의 주자가 집성・정리한 후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송명유학(宋明儒學)이라 부르며, 조선왕조가 수입한 사상 또한 바로 이 ‘성리학’, 즉 ‘송대유학’이었다.


주희는 국가이념으로 작용했던 한당유학을 관료를 위한 실용학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통유학으로 인정치 않았으며, 대신에 이들은 선진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주희는 중국의 성왕인 ‘요’에서 ‘순’으로 이어진 ‘도(道)’가 ‘우’에서 ‘탕왕’으로 그리고 다시 ‘문,무,주공’으로 이어진 후에 공자가 전수받아 맹자에게로 갔는데 그 이후 전수되지 못하고 끊어졌다고 보았다. 그러하던 것이 정호(鄭顥)와 정이(鄭伊) 형제에 의해 다시 이어졌다고 보면서 이른바 ‘도통론(道統論)’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사실 이러한 주희의 도통론적 입장에서 등장한 것으로, 그 이전 유학에서는 따로 정립해 둔 개념은 아니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마치 유학의 대표 경전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송대 유학에 국한된 것일 뿐 선진유학이나 한당유학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유학은 불교철학의 영향을 받아 매우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선진유학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으나 새로이 추가된 내용들이 매우 많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기론(理氣論)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유학의 시기적 구분에 따른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유학이 시대마다 그 내용과 추구하는 방향성을 달리했으며 정치적 목적도 달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공자는 왜 유학의 사상을 꿈꿨을까?


선진유학을 대표하는 공자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 인격수양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남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세상에 도를 실현하여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사상은 너와 나 사이의 '사랑'을 강조한 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인에 바탕하여
예를 일으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과 분수를 지킴으로써 안정과 평화 화합 그리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정명사상, 정치를 맡은 자는 덕을 배풀고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덕치주의적 사상,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평등을 누릴 수 있고 정의를 분별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럼 왜 공자는 유학의 사상을 꿈꾸게 되었을까?

공자가 주장하는 인간관은 새로운 정신적 용광로에서 조화를 이루어 체계화되기를 바라고, 자기 수양과 실천을 통하여 인(仁)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에 있고 성선설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의 길을 계발하는 교육방법을 추구하였다.


그 교육 내용으로 문교(文敎), 행교(行敎), 충(忠敎), 신교(信敎)이며, 문교(文敎)의 방향은 시교(詩敎), 서교(書敎), 예교(禮敎), 악교(樂敎)가 중심이 되고 있다. 또한 교육의 내용은 앎(知)과 인성(人性)의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성인 즉, 군자를 기르는 것에 두었다. 이것은 ‘존재의 숭고한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현재 어떠한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현재적 관점에서의 자기 존재 확인 및 성장 가능성에 대한 확인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소인에서 군자라는 인간상에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라 공자가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학의 사상을 꿈꾸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끝맺는 말


공자는 인간중심사상으로 배움의 자발적인 깨우침을 강조하였고, 자율성의 존중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윤리의식과 함께 인성교육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하였다. 또한 공자의 교육은 군자를 양성하는 것에 두어 도덕성의 회복을 교육의 주안점으로 두었다. 이러한 덕성의 내면화한 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내어 본질적으로 진실하고 전인적인 인격완성에 교육의 의미를 두었다. 여기에서 전인교육의 의미는 교육내용의 구성요소가 이론적인 지식의 교육과 실제적으로 쓰이는 교육과의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에서 강조하는 덕행(德行)은 바로 이러한 행동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천궁행(實踐躬行)은 자기 스스로 배운 내용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인(仁)과 지(知)의 완성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즉 교육은 이론적인 지식과 실제적인 지식의 통합에서 활동과 경험의 과정이 이루어지며 그 속에서 참다운 앎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군자학’이라 할 수 있는 공자의 전인교육의 교육적인 함의는, 오늘날 우리들 각 개인 및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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