鷄:닭 계. 肋:갈빗대 륵.
[출전]《後漢書》〈楊修傳〉. 《晉書》〈劉伶傳〉
먹자니 먹을 것이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란 뜻. 곧 ①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 ② 닭갈비처럼 몸이 몹시 허약함의 비유.
① 삼국 시대로 접어들기 1년 전(219)인 후한(後漢) 말의 일이다. 위왕(魏王) 조조(曹操)는 대군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원정을 떠났다. 익주[益州:사천성(四川省)]을 차지하고 한중으로 진출하여 한중왕을 일컫는 유비(劉備)를 치기 위해서였다. 유비의 군사는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정면 대결을 피한 채 시종 보급로 차단에만 주력했다. 배가 고파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자 조조는 어느 날, 전군(全軍)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계륵(鷄肋)!”
‘계륵?’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주부(主簿) 벼슬에 있는 양수(楊修)만은 서둘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 장수가 그 이유를 묻자 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닭갈비는 먹자니 먹을 게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한중 역시 그런 닭갈비 같은 땅으로 생각하고 철군(撤軍)을 결심하신 것이라오.”
과연 조조는 며칠 후 한중으로부터 전군을 철수시키고 말았다.
[주] 한중 : 섬서성(陝西省)의 서남쪽을 흐르는 한강(漢江:양자강의 큰 지류) 북안의 험한 땅으로서 진(秦)나라를 멸한 유방이 항우로부터 분봉(分封)받아 한왕(漢王)을 일컫던 곳.
② 진(晉:西晉, 265~316)나라 초기에 죽림 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취하여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은 점잖게 말했다.
“보다시피 ‘닭갈비[鷄肋]’처럼 빈약한 몸이라서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는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