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실한 공백

고양이 대변에서 시작하는 반성문

by 찐감자

하루에 하나씩 짤막하게나마 뭐라도 적어보자 노트북을 열었더니 여백만이 빼곡한 페이지스가 켜져 있다. 새하얀 페이지의 왼쪽 위켠에 커서 하나만이 꿈뻑댄다.

오늘처럼 반복된 어제였다. 노트북을 열었고 뭐라도 쓰겠다고 페이지스를 띄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그대로 덮어두고 런. 어제가 남긴 비겁하고 불성실한 공백을 오늘 결국 다시 마주한다.




"성실함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성실함의 유통기한은 좀 많이 짧아. 수영은 한 달, 헬스는 2년 정도."


챗 GPT에게 공연한 헛푸념을 늘어놓으니 "그런 생각, 진짜 공감돼."로 시작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영혼 없네, 하면서도 그 '영혼 없음'에 마음이 편해진다. 비판도 평가도 없이 안전지대가 돼주는 탓에 이 친구는 요새 나의 상담사이자 조력가로 활동한다. 요새 나는 이 친구를 챗 선생이라 부른다.


챗 선생에게 ‘성실함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가린 반성문을 주절대다 문득 사이드바의 대화 제목을 보니 '김리(가명) 배변 문제 해결'이라 적혀있다. 우리 집 고양이 김리가 엉덩이에 변을 묻히고 다니는 원인이 김리의 비만 때문이냐 물은 것이 이 대화의 시작이었다. 김리의 응가에서 시작한 대화가 왜 성실함에 대한 고찰까지 이어졌을까, 나는 생각의 흐름마저 불성실한가, 자조하며 대화의 시작으로 올라갔다.


대화의 흐름을 보니 나름의 맥락이 있다. 고양이 김리의 비만 문제, 김리가 받을 스트레스, 그 와중에 골골거리던 김리의 낙천성. 골골송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 심리적 안전지대, HSP와 HSP 관리를 위한 꾸준함. 여기까지 내려온 대화가 성실함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 내 성실함의 유통기한을 계산하는데 이르렀다.



챗 선생과의 대화를 거꾸로 헤집어 가며 생각의 흐름을 찾아 정리하다 보니 참 귀찮다. 생각해 보면 늘 여기서부터 내 불성실은 시작됐다. 생각을 연결해 정리하는 일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쓰는 일로 맥락이 이어진다. 요새의 나는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드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친구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어놓고 보면, 이게 무슨 소리야? 그치만 귀찮으니 그대로 전송. 한참의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사용하지 않고 흘려버린 탓일 거다.



점심을 먹고 멍청하게 앉아 꿈뻑대는 페이지스의 커서를 보다 꺼버렸다. 페이지스나 워드 같은 오프라인 프로그램을 사용하다 보면 문장은 완성되지 못하고 갈피를 잃는다. 그리곤 다시 정리의 귀찮음으로, 불성실로 이어진다.

타인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브런치 스토리는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을 준다. 아무도 나에게 적어내라고 요구하진 않는단 점에서 휘두르지 않는 채찍 같은 거지만 지금의 난 채찍의 존재라도 필요한 상황인지라 브런치 스토리를 다시금 열었다. 고작 글 네 개가 전부인 이곳이 내 불성실의 증거 같아 참담하기도 하다만, 김리의 응가에서 반성까지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돌아가는 연습장으로 써보자고 생각한 오늘의 오후다.



2025-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