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고, 데드리프트나 하자.

뇌에 힘주면 정신병도 참아지니까.

by 찐감자

지난달 어느 주말, 새해를 기념하며 인왕산에 다녀왔다. 인왕산은 고도 339m로 서울의 산 중 등산 난이도 '하'에 포함되는 산이다. 촬영을 제외하고 산을 오른 일이 없기 때문에 쉬운 난이도의 산을 골랐다. 등산에는 작년 한 해 함께 일한 팀원들이 함께 했다. 나와는 각자 3살, 5살, 9살 차이가 나는 동생들로 다양한 나이의 군집이다.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촬영 전부터 헬스나 요가 등의 운동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의 단체 카톡방 이름은 ‘헬스방’이다.

촬영이 시작된 첫 달에 우리는 남양주에 있었다. 남양주에는 당시 우리 영화의 메인 세트였던 ‘남양주종합촬영소’가 있는데, 그곳은 시내 쪽이 아닌 북한강 앞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듬성듬성 카페나 식당, 모텔이 있을 뿐 다른 놀거리가 없는 곳이다. 주말이나 돼야 나들이 온 차들로 도로가 막히는 그런 곳. 그곳에서 약 한 달 정도를 머물렀다. 이틀 이상 쉴 수 있는 휴차가 있다면 각자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다음 날 일찍 움직여야 하는 일정 상 하루의 휴차만이 주어지는 때는 꼬박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덕분에 첫 휴차였던가 두 번째 휴차였던가 아니면 그 이상이었나 기억은 가물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으나 이동의 자유는 없던 어느 날 우리는 남양주 시내에 위치한 헬스장에 갔다. 처음으로 일일권을 끊은 날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2019년도, 바깥 활동이 힘들어질 만큼 기온이 오른 던 무렵 나는 정신과를 찾았다. 그때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불안감 때문에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해 봄부터 병원을 찾기 직전까지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행복감에 감겨있었고 그 덕에 활동량 또한 많아져 일주일 내내 해를 쫓아다니며 광합성을 해댔던 터라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은 나의 일상을 전복시키기에 차고 넘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나의 불안감의 실체를 알 수 없었고, 다만 매일 잠만 자거나 이유도 없이 눈물 흘리며 칩거했으며, 그로 인해 태어나 처음 찾은 정신과에서 내린 진단은 ‘조울증 의심’이었다.

지난 11월 촬영이 끝나고 나는 약한 번 아웃 상태에 빠졌었다. 한 달 동안은 편집실로의 출근을 제외한 시간을 집 안에서만 보냈다. 집에서도 딱히 다른 활동을 하진 않았고 꾸역꾸역 업무를 보거나 청소도 빨래도 미뤄둔 채 누워서 책을 보거나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숏폼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 달 여를 허송하게 보내고 나니 나름의 에너지가 찼는지, 내 게으름과 나태함이 스스로 한심스러웠는지 문득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새해 첫날에 다시 헬스장을 찾았다.

다행히도 다시 운동을 시작한 이후 몇 날 며칠을 누워서 보내지 않는다. 쉽게 나 자신에 대해 자책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러닝머신 위에서 시속 9나 10km로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하기 싫다거나, 집에 가고 싶다거나, 다른 걱정이나 고민도 사라진다. 그렇게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달리고 헬스장 밖으로 나와 그 에너지로 또 하루를 산다. 서른 살 그때처럼 뭐든지 다 해낼 것 같은 그런 부유하는 행복감은 아니지만 정신이 단순해지면서 맑아지는 그런 만족감이다. ‘그래 뭐 어쩌겠어. 지나간 일은 됐고, 이제 뭐 하지?’ 요즘 내 생각의 틀이다. 연민하던 과거는 사라졌고 현재와 미래 만이 우선될 뿐이다.




헬스방 친구들과 남양주에서 처음 헬스장을 간 이후로 우리는 몇 번의 휴차를 헬스장에서 보냈다. 매번 모두 함께 했던 것은 아니고 둘, 혹은 셋이, 때로는 혼자 운동을 했다. 뭐 많지 않은 횟수였지만 여느 촬영 때처럼 술 마시고 노는 대신 헬스장에서 몇 번의 휴차를 보냈다는 것으로도 정서적인 만족감이 꽤 컸다. 후에는 종종 배드민턴도 치곤 했고, 그게 나름의 운동 모임처럼 이어져 오랜만에 조우하는 날을 등산 데이로 정하는 데까지 간 것이다.

뇌에 힘주면 정신병도 참아진다고, 예전에 내 친구 SJ가 해 준 이야기다. 스트레스받거나 우울해질 때 정신 잡고 버티자는 맥락에서 농담 식으로 했던 말이다. 사실 우울증이든 조울증이든 질환일 뿐이라 아프면 병원 가서 처방받고 치료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다. 운동하라거나 일단 밖으로 나가라고 해도 실행할 수 없는 상태가 우울증이란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세상을 버티기 위해 하는 비논리적인 생각은 뇌에도 근육이 있다는 거다. 우울감이 아직 날 다 덮지 않은 때 운동을 해두면 무언가는 단단해져서 날 흔들리지 않게 할 뿌리가 돼줄 거라 믿는다. 그 무언가가 다리든, 머리든, 어디든 간에 말이다. 사실 다리만 안 흔들려도 진동은 머리까지 가지 않는다.





'대헬스 시대'라 워낙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어찌 됐든 주변에 함께 운동하고 건강하게 지낼 동료들이 있었다는 행운이 평탄치 않았던 작년 한 해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 헬스방 친구들과 드물게나마 갔던 운동이 머리를 단단하게 해 줬고 그 근육으로 지난달 주저앉으려 하던 나는 뇌에 힘을 주며 번 아웃 상태의 나 자신을 들어 올렸다. 나는 요즘 데드리프트를 40kg까지 드는데, 다음 달까지 50kg으로 증량하는 것이 목표다. 50kg은 내 체중이다.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를 나를 들어 올리려면 그 정도까지는 증량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욕심부리지는 말고 (다치니까!) 내일은 일단 차근차근, 40kg에 익숙해질 수 있게 세트 수부터 늘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