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틱' 6월호 한국어 번역
*이 글은 미 월간지 '애틀랜틱' 6월호에 실린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보기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story published in <The Atlantic> June 2017 issue, "My Family's Slave" by Alex Tizon / Not translated for profit - just out of pure interest in the article and to share with Korean-speaking readers)
유골은 토스터 기계만 한 크기의 플라스틱 상자를 가득 채웠다. 무게는 1.6 킬로그램. 나는 상자를 토트백에 싸서 여행 가방에 넣었다. 7월,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가기 위해서였다. 마닐라에서부턴 차를 타고 시골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도착한 곳에서 나는, 56년 동안 우리 집 노예로 일했던 여성이 남기고 떠난 모든 걸 전달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유도씨아 풀리도. 우린 그를 '롤라'라고 불렀다. 키 125센티, 피부는 모카색, 눈은 아몬드 모양. 롤라에 대한 내 첫 기억은 바로 그 아몬드 눈이었다. 아직도 나를 바라보던 그 눈이 선하다. 우리 할아버지가 롤라를 엄마에게 선물로 준 해, 롤라는 18살이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 올 때도 롤라는 함께였다. 그녀가 살아온 삶은 '노예'라는 단어 외에 그 어떤 단어도 아우를 수 없었다.
롤라의 하루는 우리 가족 모두가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해 모두가 잠든 이후에 끝이 났다. 하루 세 끼를 차리고 집안을 치우고 부모님을 시중들고 우리 5형제를 돌봤다. 부모님은 롤라에게 급여를 준 적이 없었고 항상 야단만 쳤다. 실제로 족쇄를 채운 건 아니었지만 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가는 밤이면 매번 빨랫더미에 고꾸라져 구석에서 자고 있는 롤라를 발견했다. 개던 빨래를 손가락에 낀 채로.
우리 동네 미국인 이웃에게 우리 가족은 전형적인 이민자 모델이자 '포스터 패밀리(역주: 쇼윈도 가족)'였다. 적어도 동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 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가 있었고 어머니는 의사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나와 형제들은 성적을 잘 받아왔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꼭 붙였다. 롤라에 대해서는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비밀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본모습을 담았고, 아직 아이들이었던 우리 형제가 이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 드러냈다.
1999년에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뒤, 롤라를 내가 살던 시애틀 북부 마을로 데려왔다. 내게도 가족과 직장과 집이 있었다. 난 아메리칸드림을 이뤘다. 그리고 내겐 노예가 있었다.
마닐라에 도착해 수하물을 찾았다. 짐가방을 열어 롤라의 유골이 잘 있나 확인했다. 밖으로 나와 익숙한 공기를 들이켰다. 배기가스와 쓰레기 냄새가 진하게 뒤섞인, 바다와 달콤한 과일과 땀 냄새가 한데 얽힌 공기.
다음날 아침 일찍 운전기사를 찾아 그의 트럭을 타고 함께 출발했다. 기사는 '두즈'라는 이름의 상냥한 중년 남성이었다. 우린 교통체증을 따라 길을 누볐다.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언제나 기가 막힌다. 수많은 차와 오토바이와 지프니, 그저 놀랍다. 사람들은 차 사이사이와 인도를 가득 메우며 갈색 인파를 형성한다. 행상인들은 맨발로 차 사이사이를 총총 걸어 다니며 담배나 목캔디, 삶은 땅콩 따위를 판다.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은 차 창문에 얼굴을 들이민다.
두즈와 내가 향하는 곳은 롤라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다. 마닐라 북쪽에 있는 평야 지대, 탈라크 지방이다. 쌀이 나는 곳이다. 시가를 문 토머스 아순씨온 중위, 우리 할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톰(토머스) 중위는 아주 강하고 별나고 다소 어두운 남성이었다. 땅은 많았지만 돈은 별로 없었고 여러 집에 정부를 뒀다. 그의 부인은 아이를 낳다 목숨을 잃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외동딸인 우리 엄마다. 엄마는 '우투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손에 자랐는데, 우투산은 다른 말로 하자면 '명령을 받는 자들'이란 뜻이다.
필리핀이라는 이 섬나라는 노예제도의 역사가 길다. 스페인의 지배 전, 섬사람들은 다른 섬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왔다. 주로 전쟁 포로라든지 범죄자나 빚진 사람들이었다. 이 땐 여러 노예가 있었는데, 용맹함을 보여 자유를 쟁취하는 '전사'부터 소유물로 여겨져 사고팔 수 있는 '가정 노예'까지, 종류가 많았다. 신분이 높은 노예는 신분이 낮은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신분이 낮은 노예는 더 낮은, 가장 천한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다. 어떤 노예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길 선택했다. 이들은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음식과 거주지를 얻었고 보호도 받을 수 있었다.
1500년 경, 스페인 사람들이 와서 섬사람들을 노예로 삼았고 나중에는 아프리카와 인도 노예들도 여기로 데려왔다. 결국 스페인 왕은 본토와 식민지 땅의 노예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해갔지만 필리핀 일부 지역은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중앙 관리들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전통은 여러 형태를 띠고 끈질기게 이어졌고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한 이후에도 지속됐다. 오늘날에도 가난한 사람들마저 '우투산'이나 '카툴롱(도우미)' 또는 '카삼바하이(가정부)'를 둘 수 있다. 본인보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가능한 일이다. 인력 시장은 그 골이 깊었다.
톰 중위의 소유지에는 많게는 세 가정의 우투산들이 살고 있었다. 1943년 봄, 일본이 필리핀을 지배하던 때, 톰 중위는 아랫마을에서 한 여자아이를 데려왔다. 쌀농사를 짓는 먼 친척의 자녀였다. 약아빠진 톰 중위는 이 소녀가 돈 한 푼 없고 학교도 가지 않았고 다루기 쉽다는 걸 알아챘다. 소녀의 부모는 소녀를 돼지 키우는 농부에게 결혼시키려고 했다. 소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많은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 절망적이었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다. 톰은 소녀에게 접근해 제안을 했다. 이제 12살이 된 내 딸을 돌봐주기로 약속하면 음식과 집을 얻을 수 있다고.
롤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거래가 종신 거래가 될 줄은 모른 채.
톰 중위는 자신의 딸에게 롤라를 데려와 말했다. "이 아이는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야."
"난 싫어." 선택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톰 중위는 곧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떠났고 엄마는 롤라와 함께 삐걱거리는 시골집에 남겨졌다. 롤라는 엄마를 먹이고 입히고 가꿔주었다. 둘이 시장으로 걸어갈 때면 롤라는 우산을 들어 엄마를 위해 해를 가려줬다.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 바닥을 쓸고 카밀링 강가에 가서 손으로 빤 빨래들을 말리고 갠 이후, 밤이 되면 롤라는 엄마 침대 발치에 앉아 엄마가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줬다.
전쟁 중 어느 날, 집에 온 톰 중위는 엄마가 거짓말 한 것을 알아챘다. 엄마가 대화해서는 안 되는 남자아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몹시 화가 난 톰은 엄마에게 "식탁에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엄마는 롤라와 함께 구석에 웅크렸다. 그때,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롤라가 대신 매를 맞을 거'라고 대답했다. 롤라는 애원하듯 엄마를 쳐다봤지만, 말 한마디 없이 식탁 귀퉁이를 붙잡고 섰다. 톰은 벨트를 들어 12번 채찍을 날렸다. 한 대를 때릴 때마다 한 단어씩 끊어 소리치면서. 너. 절. 대. 로. 내. 게. 거. 짓. 말. 하. 지. 마. 롤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는 그 때를 회상하며 그 터무니없음을 즐기는 듯했다. 마치 '내가 그랬다는 게 상상이나 가니?'라고 묻는 듯한 톤으로 말했다. 롤라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롤라는 엄마가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나 궁금해했다. 골똘히 이야기를 듣던 롤라는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다시 슬픈 얼굴로 나를 보더니 "그래. 그랬었지." 한 마디만 남겼다.
7년 후인 1950년,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해 마닐라로 이사 가면서도 롤라를 데려갔다. 톰 중위는 오랫동안 악귀에 시달리다 1951년, 자신의 관자놀이에 32 구경 캘리버 총을 쏘아 악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는 이 사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엄마도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이었고 톰처럼 제왕적이면서도 속으론 섬약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엄마는 톰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담아뒀다. 그 가르침 중 몇 가지는 제대로 된 시골의 '마트로나(Matrona. 능수능란한 성인 여성)'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너는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가정과 각 개인의 안녕을 위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사람들이 울거나 불만을 드러낼 때도 있겠지만 그들의 영혼은 네게 감사할 거다. 신이 의도한 대로 되어가도록 네가 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를 사랑할 거다.
우리 형, 아서는 1951년에 태어났고 그다음이 나, 그리고 줄줄이 동생 세 명이 태어났다. 부모님은 롤라가 마치 부모처럼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대하길 기대했다. 롤라가 우리를 돌보는 동안 부모님은 학교에 다니며 학위를 땄다. 그렇게 부모님은 화려한 학위는 얻었지만 막상 직업은 없는, 그런 계급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됐다.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외교부에서 상업 애널리스트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월급은 변변찮았지만 미국에서 일하는 자리였다. 엄마와 아버지 모두 꿈꾸며 자라온 그 나라, 그동안 바라 왔던 모든 것이 이뤄질 그 곳.
아버지는 가족과 가정부 한 명을 데려가도 된다고 허락받았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일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해 아이들과 집안을 돌볼 롤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엄마는 롤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롤라는 잠자코,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런 반응이 아주 거슬렸다고. 수년 후 롤라는 내게 말하길 두려웠다고, "너무 멀었다"고 했다. "(너네 엄마 아빠가)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고."
결국 롤라를 설득한 건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미국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 '용돈'을 주겠다고. 그러면 그 돈을 고향 부모님에게도 보내고 마을 가족들에게도 보낼 수 있지 않겠냐고. 롤라의 부모님은 오두막 흙바닥에 살고 있었다. 그 용돈이면 부모님에게 콘크리트 집을 지어줄 수 있었고 가족들의 삶은 영영 바뀌게 될 것이다. 상상해보라.
1964년 5월 12일. 우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착륙했다. 우리 짐은 모두 상자에 넣어 밧줄로 동여맸다. 롤라는 이때 엄마와 함께한 지 21년째였다. 내겐 여러모로 엄마나 아빠보다 롤라가 더 부모 같은 존재였다. 아침에 제일 먼저 보는 얼굴은 롤라였고 밤에 제일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도 롤라였다. 내가 아기였을 땐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롤라(맨 처음에는 ‘오-아’라고 발음했다)’라는 이름을 옹알거렸다.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롤라가 나를 안아주거나 적어도 근처에 있어주지 않는 한 잠들길 거부했다.
우리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4살이었다. 우리 가족에서 롤라의 위치를 파악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우리 형제는 태평양 반대편 연안에서 자라나면서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다를 뛰어넘은 이 도약은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의식의 도약을 야기했다.
그 때 약속받은 용돈은 전혀 없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뒤, 롤라는 부모님께 에둘러 용돈 이야기를 꺼냈다. 롤라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나중에 이질이었다는 걸 알았다) 치료에 필요한 약을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롤라는 우리 부모님께 “쁘웨데 바?”라고 물었다. 필리핀 말로 “가능할까요?” 엄마는 한숨부터 쉬었다. 아빠는 타갈로그어로 답했다.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생각을 하지? 우리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 보여? 부끄럽지도 않아?”
우리 부모님은 미국으로 오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고 또 미국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더 빌렸다.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 필리핀 영사관에서 시애틀 영사관으로 이동했다. 아버지 연봉은 5600달러였다. 아버지는 두 번째 직업으로 트레일러 청소를, 세 번째론 빚 수금업을 했다. 엄마는 의학 실험실 몇 군데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나마 함께 있을 때마저도 그들은 항상 지쳐있었고 까탈스러웠다.
엄마는 종종 퇴근 후 롤라를 혼냈다. 집을 제대로 청소하지 못했거나 우편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엄마는 독이 서린 목소리로 “내가 집에 오면 우편물이 바로 여기에 놓여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타갈로그어로 말하곤 했다. “별로 어렵지도 않구만! 바보라도 기억하겠다.” 이어 아버지가 퇴근하면 이젠 아버지 차례였다.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집안에 있는 가족은 모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끔은 부모님이 쌍으로 롤라가 눈물을 쏟을 때까지 나무랐다. 마치 롤라를 울리는 게 둘의 목표인 것 마냥.
그래서 난 헷갈렸다. 부모님은 나와 형제들에겐 잘해주었고 우린 부모님을 사랑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잘해주고 돌아서서 롤라에겐 험하게 굴었다. 내가 롤라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을 땐 11살이나 12살 쯤이었다. 그즈음엔 나보다 8살 많은 형, 아서가 이미 오랫동안 분노를 삭여왔을 때였다. 롤라가 ‘노예’라는 것을 처음 내게 이해시킨 것도 아서형이었다. 아서가 그 단어를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그저 롤라가 우리 가족 중 불행한 구성원이라고만 여겼다. 부모님이 롤라에게 소리 지를 때는 너무 싫었지만, 부모님이, 그리고 이 모든 거래 상황이 부도덕적이라는 건 깨달을 수 없었다.
“롤라 같은 대접을 받는 사람 본 적 있어?" 아서가 물었다. “롤라같이 사는 사람 말이야.” 아서가 요약한 롤라의 현실은 다음과 같았다: 급여를 받지 않는다. 매일같이 일한다. 오래 앉아있거나 일찍 잔다고 꾸중을 들었다. 말대꾸한다고 맞았다. 물려받은 옷만 입었다. 부엌에서 남은 음식이나 찌꺼기를 혼자 먹었다. 집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가족 외에는 친구나 취미생활도 없었다. 자기 방이 없었다. (롤라의 잠자리로 지정된 곳은 남는 공간들이었다 - 소파나 창고나 여동생들의 방 한 구석. 대개 롤라는 빨래더미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우린 TV나 영화에 나오는 노예 캐릭터를 제외하곤 어디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없었다. 한 번은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라는 서부 영화를 봤는데, 배우 존 웨인이 톰 도니폰이라는 총잡이 목장 주인을 연기했다. 톰은 자기 노예인 폼페이를 “보이”라고 불렀다. '저 사람 끌어올려, 폼페이.' '폼페이, 가서 의사를 찾아와.' '다시 일해, 폼페이!' 폼페이는 유순하고 순종적이었고 자신의 주인을 “미스타 톰”이라고 불렀다. 둘은 아주 복잡한 관계였다. 톰은 폼페이가 학교 가는 것은 금했지만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술집에선 술을 마실 수 있게 해 줬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폼페이는 자신의 주인을 화재에서 구한다. 폼페이가 톰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게 보였고, 톰이 죽자 폼페이는 그를 애도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영화의 핵심 내용이 아니라 주변 이야기였고, 주된 내용은 톰과 리버티 발란스라는 악당의 대결이었는데, 나는 폼페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롤라가 폼페이야, 폼페이가 롤라야.'
어느 날 밤, 아버지는 9살 여동생 린이 저녁을 거른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롤라에게 게으르다고 짖어댔다. 롤라 앞에 우뚝 서서 그녀를 노려봤다. "먹여보려고 했어요," 롤라가 대답했다. 그녀의 가냘픈 방어는 아버지를 더 화나게 했고 아버지는 롤라의 어깨 아래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롤라는 방을 뛰쳐나갔고 나는 롤라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난 아버지 앞에 섰다. "링이 자기는 배 안 고프다고 했어요."
부모님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놀란 듯한 눈치였다. 내 얼굴이 씰룩거리는 게 느껴졌다. 주로 눈물이 나오기 직전에 항상 이랬다. 하지만 이번엔 울지 않았다. 엄마의 눈에서 내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질투?
"너 지금 롤라 편을 드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그런 거야?"
"링은 배 안 고프다고 그랬어요." 나는 거의 속삭이듯 다시 한번 말했다.
그 때 난 13살이었다. 매일같이 나를 돌봐주는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처음으로 맞섰다. 나를 재워주면서 타갈로그 노래를 흥얼거려준 사람. 내가 조금 자라자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와준 사람. 한 번은 내가 오랫동안 아파서 밥을 먹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지자 롤라는 대신 음식을 씹어 잘게 만든 뒤 내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내가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을 때 (관절에 문제가 있었다) 롤라는 나를 씻겨주고 한밤중에도 약을 먹여주고 수개월 회복기간 동안 함께해줬다. 나는 그 기간 내내 짜증만 냈다. 롤라는 절대 불평하거나 인내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래서 울부짖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필리핀에 살 때, 부모님은 롤라를 대하는 방식을 숨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롤라를 더 심하게 대하면서도 이를 숨기려고 애썼다. 집으로 손님이 올 때면 부모님은 롤라를 무시하거나, 혹 누가 궁금해하면 거짓말을 하고 대화 주제를 재빨리 돌렸다. 북부 시애틀에서 살던 5년 동안 우리는 길 건너편 미슬러 가족과 가까이 지냈다. 미슬러 가족은 8명이었고 아주 떠들썩했다. 우리 가족에게 머스타드와 연어 낚시, 잔디 깎기 등을 소개해준 장본인이었다. TV에서 나오는 미식축구 경기도 같이 봤고 경기를 보며 고함도 함께 질렀다. 우리가 게임을 보고 있을 때면 롤라는 나와서 음식과 음료를 내어놓았고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롤라에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롤라는 재빨리 다시 사라졌다. 한 번은 미슬러 가족의 가장, 빅 짐이 물었다. "부엌에 숨겨둔 저 조그만 여성은 누군가요?" 아버지는 부끄러워하며 고향에서 온 친척이라고 답했다.
내 절친인 빌리 미슬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빌리는 우리 집에 자주 왔는데, 가끔은 주말 내내 있었기에 우리 가족의 비밀을 언뜻언뜻 알아챌 수 있었다. 한 번은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 지르는 걸 듣고 빌리가 부엌으로 불쑥 들어갔다. 빌리는 붉은 얼굴로 롤라를 노려보는 엄마를 발견했다. 롤라는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몇 초 뒤 내가 들어왔다. 빌리 얼굴에는 난처함과 당혹감이 뒤섞여있었다. '이게 뭐야?' 난 빌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잊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빌리는 롤라가 안됐다고 느낀 것 같다. 빌리는 롤라의 요리 솜씨에 열변을 토했고, 롤라를 항상 웃게 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롤라는 웃었다. 빌리가 우리 집에 와서 잘 때면 롤라는 빌리가 가장 좋아하는 필리핀 음식을 만들어줬다. 흰쌀밥에 소고기 타파. 요리는 롤라가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롤라가 어떤 요리를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그저 우리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건지, 아니면 우리를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젠가 내가 롤라를 먼 친척 이모라고 했을 때, 빌리는 맨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롤라가 할머니라고 소개했었다고 상기시켜줬다.
"뭐, 어떻게 보면 둘 다야." 난 오묘한 답변을 내놨다.
"왜 롤라는 항상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일 하는 걸 좋아해서."
"너네 엄마 아빠는 왜 롤라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롤라가 귀가 잘 안 들려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리 가족 모두를 완전히 노출시키는 셈이었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보낸 첫 10년 동안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며 맞춰가려고 노력했다. 노예가 있다는 건 이 방식에 맞지 않았다. 노예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고, 어느 곳에서 온 사람들인지, 깊은 의심을 품게 했다. 이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한 가족인지. 난 이 모든 것이 부끄러웠고 이 비밀에 내가 공모하고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야말로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녀가 빨고 다림질해서 옷장에 걸어준 옷들을 입고 있지 않았던가? 롤라를 잃는다는 것은 황폐함 그 자체일 것이다.
이 비밀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롤라의 이민 서류는 우리가 미국에 온 지 5년 후, 1969년을 기점으로 만기됐다. 롤라는 아버지의 직장과 연계된 특별 여권으로 우리와 동행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상사들과 몇 차례 다툼 후 영사관을 관두었고 미국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가족의 영주권은 얻었는데, 롤라는 자격 미달이었다. 원래라면 아버지는 롤라를 필리핀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
롤라의 어머니, 페르미나는 1973년 돌아가셨다. 롤라의 아버지, 힐라리오는 1979년에 숨을 거뒀다. 롤라는 그때마다 필사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부모님은 두 번 모두 미안하다고만 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아이들에겐 롤라가 필요하다고. 나중에 부모님이 털어놓길,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고 했다. 롤라가 출국하려는 바람에 미 정부에서 롤라에 대해 알게되면 부모님은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롤라의 법적 신분은 필리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TNT, '타고 낭 타고'였다. 도망자. 롤라는 TNT로 20년을 살았다.
부모님 한 분이 돌아가실 때마다 롤라는 몇 달 동안 시무룩했고 침묵했다. 부모님이 계속 보채도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은 조르고 졸라댔다. 롤라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기 할 일을 했다.
아버지의 은퇴 이후 험난한 나날들이 시작됐다. 재정은 더 빠듯했고 부모님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부모님은 가정을 뿌리째 뜯어 옮기고 또 옮겼다. 시애틀에서 호놀룰루로, 다시 시애틀로, 브롱스로, 결국 인구 750명, 화물 휴게소가 있는 오리건주 우마틸라에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이사를 감행하면서도 엄마는 종종 24시간 근무를 했다. 메디컬 인턴으로, 레지던트로 일하는 동안 아버지는 며칠씩 없었고 특이한 직업을 가졌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들을 만났다.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더 있었을 수도 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집에 와서 한 말이, 블랙잭을 하다가 얼마 전에 새로 산 스테이션 웨이건 자동차를 잃었다고 했다.
집안에 유일한 어른은 롤라뿐인 나날들이 이어졌다. 롤라는 우리 삶 속에 세세하게 들어왔다. 부모님은 그럴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고 롤라는 우리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남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 우리가 하는 생각을 다 듣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대화를 언뜻 듣는 것만으로도 롤라는 내가 6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좋아했던 여자 아이들 이름을 줄줄 읊었다.
내가 15살 때, 아버지는 아예 떠났다. 당시에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25년의 결혼 생활 끝내 엄마와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엄마는 이후 1년이나 지나서야 면허 의사가 되었고 엄마가 전공한 내과는 딱히 수익성이 좋은 분야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육아 보조금을 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항상 돈에 쪼달렸다.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갈 수 있을 정도만큼만, 겨우 버티고 있었다. 밤이 되면 엄마는 자기 연민과 절망에 무너졌다. 이 시기 동안 엄마를 붙잡아 준 위로의 근원은: 롤라였다. 엄마는 작은 일들로 롤라에게 딱딱거렸지만 롤라는 엄마를 더욱 더 챙겼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고 엄마 방을 더 세심히 청소했다. 밤늦게까지 둘이 부엌에 앉아있는 모습도 종종 봤다. 둘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가끔은 사악하게 웃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같이 격분하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이 부엌에 들락날락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느 날 밤, 엄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거실로 뛰쳐가 롤라의 품에 푹 안겼다. 롤라는 엄마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꼭 나와 형제들이 어렸을 때 해주던 것처럼. 나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를 생각하면 두려웠지만 롤라를 생각하면 경외심이 일었다.
두즈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분 정도 깜빡 졸았던 것 같았는데, 두즈의 행복한 멜로디에 잠이 깼다. "두 시간 더 가면 됩니다." 두즈가 말했다. 내 옆자리에 있는 토트백 속 플라스틱 상자를 확인해봤다. 제자리에 잘 있었다. 그리곤 눈을 들어 앞에 펼쳐진 길을 봤다. 맥아더 고속도로였다. 흘깃 시간을 봤다. "두 시간 전에 '두 시간만 더'라고 했잖아요." 두즈는 그저 콧노래만 불렀다.
두즈가 내 여행의 목적을 전혀 모른다는 게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이미 내 안에서 여러 생각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내 부모님이나 별반 다를 바 없어. 롤라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롤라의 삶이 좀 더 나아지도록. 왜 그러지 못했을까?' 부모님을 고발할 수도 있었다. 한순간에 우리 가족을 날려버리는 방법이었겠지만. 그러나 나와 우리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날아가버리진 않았으나 조금씩, 천천히 무너져갔다.
두즈와 나는 아름다운 시골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 책자에 나올 법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으나 현실적이고 생생했고, 도시와 비교하면 아주 우아한 여유가 있었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산이 나란히 달렸다. 서쪽으로는 잠발레스 산, 동쪽으로는 시에라 마드레 산맥. 능선에서 능선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모든 계열의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검은색을 방불케 하는 초록색까지.
두즈가 저 멀리 그림자가 그린 듯한 윤곽을 가리켰다. 피나투보 산. 1991년, 여기 와서 20세기의 두 번째로 큰 규모였던 화산 폭발을 취재했다. '라하르'라고 부르는 용암이 10년 이상 흘러 고대 마을을 묻어버렸고 강과 계곡을 덮어 생태계 전부를 쓸어버렸다. 라하르는 롤라의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온 탈라크 지방의 작은 언덕까지 뻗쳐갔다. 롤라와 엄마가 한때 함께 살았던 그곳이었다. 우리 가족의 기록 대부분은 전쟁과 홍수 속에서 없어졌고 또 일부는 6미터 진흙 아래 묻혀있었다.
이 곳의 삶에서 주기적인 대재앙의 방문을 빼놓을 수 없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매년 수차례 이 곳을 강타한다. 강도들의 반란은 끊임이 없다.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는 휴화산들도 있다. 필리핀은 중국이나 브라질처럼 전체가 한 덩어리로 트라우마를 흡수해내는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바다에 흩어진 바위들로 이뤄진 국가다. 재앙이 들이닥친 곳은 한동안 침몰됐다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이어간다. 지금 나와 두즈가 달려가고 있는 이 경관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온갖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 그 자체가 이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헤어지고 몇 년 후, 엄마는 재혼했다. 엄마는 새 남편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롤라에게 강요했다. 새 남편의 이름은 이반이었고, 크로아티아 이민자였다. 엄마는 친구의 소개로 이반을 만났다. 이반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네 번 결혼했고 상습적인 도박꾼이었으며, 엄마에게 얹혀살며 롤라의 시중을 받는 걸 즐겼다.
이반은 내가 전에 볼 수 없었던 롤라의 면을 끄집어냈다. 이반과 엄마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불안했고 돈 문제가 - 특히 이반이 엄마가 벌어 온 돈을 쓰는 것 - 그 중심에 있었다. 한 번은 엄마와 이반이 다퉜는데, 엄마는 울고 있었고 이반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때 롤라가 걸어와 둘 사이에 우뚝 섰다. 롤라는 이반에게 몸을 돌려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롤라를 쳐다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 앉았다.
나와 내 여동생 인데이는 당황했다. 이반은 113kg이었고 그의 바리톤 목소리는 벽을 울렸다. 롤라는 단 한 마디로 그를 제압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같은 상황이 연출됐지만 대개 롤라는 아무 의심 없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이반을 위해 일했다. 난 롤라가 다른 사람, 특별히 이반 같은 사람에게 신하처럼 스스로 낮추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폭발하게 된 계기는 좀 더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엄마는 롤라가 아플 때마다 화를 내곤 했다. 신경 쓰는 것도, 비용이 나가는 것도 원치 않았고 되려 롤라에게 아픈 척을 한다거나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엄마는 1970년대 들어서 롤라의 치아가 빠지기 시작하자 '돌보지 못했다' 전략을 선택했다. 롤라는 수개월 째 입이 아프다고 말하던 터였다.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야." 엄마가 롤라에게 말했다.
나는 롤라가 치과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롤라는 이미 50대였고 단 한 번도 치과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 시간 여 떨어진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종종 집에 방문할 때마다 이 문제를 꺼내고 또 꺼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고 또 2년이 지났다. 롤라는 통증 때문에 매일 아스피린을 먹었고 롤라의 치아는 마치 부스러지는 스톤헨지 같아 보였다. 어느 날 밤, 롤라가 빵을 입 옆으로 넣어 그나마 몇 개 안 남아있는 한쪽 어금니로 씹는 모습을 보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야밤에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각자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며 흐느꼈다. 엄마는 가족 모두를 책임지느라 지문이 닳도록 일하느라 지쳤다고, 자녀들이 항상 롤라 편을 든다고 했다. 왜 차라리 망할 롤라를 데리고 가지 않느냐고, 본인은 처음부터 롤라를 원했던 것도 아니라고, 이렇게 오만하고 신성한 체하는 놈은 아들로 주지 말아야 했다고 신에게 한탄했다.
난 엄마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리곤 대답했다. 척하는 건 엄마야말로 잘 알겠다고, 엄마의 삶이야말로 전부 가식이라고, 단 일분 만이라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롤라의 머리통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망할 치아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게 보일 거라고, 제발 한 번만이라도 롤라를 엄마를 위해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봐줄 수 없느냐고 했다.
"노예," 단어에 힘을 주어 엄마가 말했다. "노예라고?"
결국 야밤의 말다툼은 나는 절대 엄마와 롤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선언으로 끝이 났다. 절대. 엄마의 목소리는 목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소리였다. 그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목소리는 마치 배를 때린 강한 주먹 한 방 같다. 나를 낳아준 엄마를 미워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난 그날 밤 엄마가 미웠다. 엄마의 눈빛은 엄마도 같은 심정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싸움은 오히려 엄마의 두려움을 키웠다. 롤라가 자기 자녀들을 훔쳐갔다는 두려움. 엄마는 롤라가 그 대가를 치르도록 더 못되게 굴었다. "이제 네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게 됐으니 좋겠다"는 말로 롤라를 괴롭혔다. 나와 형제들이 롤라를 도와 집안일을 할 때면 엄마는 씩씩댔다. 비꼬듯 "롤라, 이제 자러 가도 되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했어. 네 아이들이 걱정하고 있잖아." 그러다 나중에 침실로 롤라를 불렀고 롤라는 부은 눈으로 방을 나왔었다.
결국 롤라는 우리에게 제발 도와주지 말라고 빌었다.
우리는 왜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느냐고 물었다.
"그럼 요리는 누가 하니?" 롤라가 말했다. 이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럼 모든 걸 누가 하니?'를 뜻했다. 누가 우리를, 엄마를 돌보나. 또 한 번은 롤라가 말하길,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니?"라고. 이 말이야말로 진심에 가까웠다. 미국으로 온 건 미친 짓이었고 한 숨 돌리기도 전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터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20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롤라의 머리는 어느덧 회색 빛을 띠었다. 롤라의 고향에 남은 친척들 중에는 롤라가 돈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소식이 없자 롤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의아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롤라는 돌아가자니 부끄러운 거였다.
그렇다고 롤라가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기 앞에서 롤라는 얼떨떨했다. 현금지급기, 인터콤, 자판기 등 기계, 키보드가 있는 것이라면 뭐든 롤라는 패닉에 빠졌다. 말을 빨리 하는 사람들 앞에서 롤라는 말문이 막혔고, 롤라의 떠듬이 영어도 상대방의 말문을 막았다. 롤라는 도움 없이는 예약을 할 수도, 여행을 계획할 수도, 문서를 써 내려갈 수도, 음식을 주문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롤라에게 내 계좌와 연동된 현금 카드를 주고 사용법을 알려줬다. 한 번은 성공했지만 두 번째엔 허둥대어 이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카드는 내가 준 선물이라 여기고 잘 두었다.
롤라에게 운전하는 법도 알려주려고 해 봤다. 롤라는 손짓 한 번으로 그 생각을 떨쳐냈다. 하지만 나는 롤라를 데리고 가서 차 운전석에 태웠다. 이 상황이 웃겨서 우리 둘 다 깔깔댔다. 20분 동안 기본적인 작동법을 알려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롤라의 눈빛은 '유쾌함'에서 '무서움'으로 변해갔다. 내가 차에 시동을 걸고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자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롤라는 차에서 뛰쳐나가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이후로도 몇 번 더 시도해보긴 했다.
나는 운전을 한다면 롤라의 삶이 바뀔 줄 알았다. 여기저기 가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엄마와의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운전해서 영영 도망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4차선은 2차선이 됐고, 포장도로는 자갈밭으로 변했다. 트라이시클(오토바이 옆에 마차를 고정시킨 필리핀의 이동수단) 운전사들은 대나무를 끌고 가는 물소와 차량 사이사이를 달렸다. 가끔 개나 염소가 길로 튀어나와 우리 트럭 범퍼를 거의 스쳐 지나갔다. 두즈는 속도를 절대 줄이지 않았다. 여기선 어차피 길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들은 내일 죽으나 오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시골길을 지배하는 법칙은 그랬다.
나는 지도를 꺼내 우리의 목적지, 마얀톡 마을로 가는 길을 짚어봤다. 창 밖 저 멀리에는 허리를 접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마치 구부린 못처럼 박혀있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듯, 쌀을 재배하는 사람들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해가 든 싸구려 플라스틱 상자를 두드리며 자기나 자단목으로 만든 진짜 유골 단지를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롤라네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가족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롤라의 자매, 98세의 그레고리아만 이 마을에 남아있었다. 그레고리아의 기억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친척들에 따르면 그레고리아는 롤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지만 금세 자기가 왜 그랬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롤라의 조카 중 한 명과 연락을 주고받아왔다. 그 조카가 오늘 일정을 모두 준비했다: 내가 도착하면 간단한 추모식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마얀톡 공동묘지 작은 공간에 롤라의 유해를 묻을 계획이었다. 롤라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5년이 지났지만, 곧 있을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직까지 아껴두었다. 하루 종일 엄청난 슬픔이 느껴졌지만 감정을 꾹 눌렀다. 두즈 앞에서 통곡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 가족이 롤라를 대한 방식이 부끄러웠던 것보다, 마얀톡에 있는 롤라의 친척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걱정보다, 롤라를 잃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마치 어제 롤라를 잃은 듯 괴로운 무게감을 선사했다.
두즈는 로물로 고속도로에서 북서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리곤 엄마와 톰 중위가 살았던 동네 '카밀링'에서 급 좌회전을 했다. 2차선은 1차선이 됐고, 자갈길은 흙길이 됐다. 길은 카밀링 강을 따라 이어졌고 눈 앞에는 초록색 언덕이, 양 옆에는 대나무로 지은 집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거의 다 왔다.
엄마의 장례식 때도 추도문을 읽었다. 그날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엄마는 용감했고 기운찼다. 물론 종종 밑지는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엄마는 기쁨이 넘쳤고 환했다. 자녀들을 사랑했고 우리에게 오리건주 세일럼에 진짜 집을 - 우리 가족이 80년대와 90년대를 보낸, 전례 없는 보금자리를 - 만들어줬다.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우리 모두 엄마를 사랑한다고 읊었다.
롤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며 롤라를 머릿속에서 선택적으로 차단했던 것처럼.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정신적 수술을 요구했다. 우리가 다시 엄마와 아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특히 90년대 중반에 들어 엄마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당뇨병. 유방암. 피와 골수에 암세포가 아주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급성 골수 백혈병까지. 엄마는 하루아침에 원기 왕성한 모습에서 노쇠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때 엄마와 크게 싸운 뒤로부턴 가급적 집에 가지 않았다. 23살이 되어서는 시애틀로 이사를 가버렸다. 그래도 가끔 집에 방문할 때면 변화가 느껴지긴 했다. 엄마는 여전했지만, 예전만큼 끈질기진 않았다. 롤라에게 근사한 틀니도 해줬고 방도 따로 마련해줬다. 나와 형제들이 롤라의 법적 체류 신분을 바꾸려고 절차를 밟을 때도 협조해줬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역사적인 이민법으로 수백만의 불법체류 이민자들이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긴 절차였지만 결국 롤라는 1998년 10월에 미국 시민이 됐다. 엄마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4개월 만이었다. 엄마는 그 후 일 년을 더 살았다.
그즈음 엄마와 이반은 오리건주 해안가에 있는 링컨 시티로 여행을 가곤 했다. 가끔은 롤라도 데려갔다. 롤라는 해변을 사랑했다. 바다 저편에는 그토록 꿈꾸던, 돌아가고픈 섬나라가 있었다. 게다가 롤라가 가장 기쁠 때는 엄마가 롤라 옆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해변에서의 오후. 부엌에 서서 옛 시골 생활을 떠올리는 15분. 그거면 롤라는 수년간의 고통을 싹 잊는 듯했다.
난 그리 쉽게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를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긴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내게 그간 써온 일기장을 주셨다. 일기장은 나무로 만든 트렁크 두 통에 꽉 들어찼다. 잠자는 엄마를 옆에 두고 일기장 페이지를 넘겼다. 그동안 내가 보길 거부해왔던 엄마 삶의 단편들이 언뜻 보였다. 엄마는 여성으론 드물게 의대에 진학했다. 미국으로 와서 여성으로서, 이민자 의사로서 존중받기 위해 싸워왔다. 엄마는 세일럼에 있는 페어뷰 트레이닝 센터에서 20년 간 일했다. 발달 장애자들을 위한 주립 기관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엄마는 커리어 대부분을 약자들을 돌보며 보냈다. 그들은 엄마를 칭송했다. 동료 여성 직원들은 가까운 친구가 됐다. 다소 유치하고 '여자여자한' 일도 같이 했다. 신발 쇼핑이라든지, 서로의 집에 돌아가면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연다든지, 남성 성기 모양의 비누나 반나체 남성들이 가득한 달력처럼 웃긴 선물을 교환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파티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엄마도 가족과 롤라와 떨어진, 엄마만의 삶이 있었다. 당연했다.
엄마는 우리 형제 한 명 한 명을 두고 아주 상세히 적었다. 자랑스러운 것도, 사랑스러운 것도, 후회스러운 것도 그날그날 우리에게 느낀 것들을 적었다. 남편들에 대한 내용도 많았다. 엄마의 이야기 속에선 그들의 복잡한 성격들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보였다. 우린 모두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롤라는 주변적이었다. 롤라가 일기장에 등장할 때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속의 작은 캐릭터였다. "우리 사랑하는 알렉스가 새 학교로 등교하는 날이었다. 롤라가 알렉스를 데려다줬다. 얼른 알렉스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서 더 이상 이사 가는 걸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곤 내 이야기가 뒤로 두 페이지 정도 더 이어졌지만, 롤라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날, 가톨릭 신부가 집으로 와서 마지막 의례를 거행했다. 롤라는 엄마 침대 옆에 앉아 빨대 꽂은 컵을 들고 엄마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에게 더욱더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엄마에게 복수를 하거나 엄마의 허약함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롤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신부는 엄마에게 용서받고 싶은 일이나 용서해주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거의 감길 듯한 무거운 눈으로 방을 훑어봤다. 그리곤 시선은 따로 둔 채 롤라의 손 위에 그저 자기 손을 포갰다. 말 한마디 없이.
롤라가 나와 살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온 게 75세일 때였다. 난 결혼해 딸 둘을 두고 있었고 나무가 우거진 곳에 지은 아늑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집 2층에서는 퓨젯 사운드(워싱턴주 북서부 태평양 만)가 보였다. 롤라에게 방을 하나 주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게 해 줬다: 늦잠을 자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거나. 롤라는 생애 처음으로 마음껏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를 살짝 미치게 했던 롤라의 모든 습관들을 잊고 있었던 거였다.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스웨터를 꼭 입으라는 잔소리를 항상 해댔다. (난 40대였다) 아버지와 이반에 대한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놨다: 아버지는 게을렀고, 이반은 거머리였다.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더 무시하기 힘들었던 건 롤라의 광적인 근검절약 정신이었다. 롤라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가끔은 쓰레기를 모두 뒤져 우리 모두 쓸모 있는 걸 버리지 않았나 확인하기까지 했다. 키친타월을 쓰고 또 쓰고 또 써서 손에서 분해될 때까지 썼다. (아무도 그 키친타월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부엌은 장바구니, 요거트 통, 피클 병 등으로 넘쳐났고 우리 집 일부 구석은 쓰레기 -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 창고로 변해갔다.
우리 가족 모두 바나나나 그래놀라 바 하나를 집어서 나가 아침을 때우는데도 롤라는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우리 가족의 침구 정돈도, 빨래도, 청소도 롤라가 했다. 처음에는 롤라에게 좋게 말했다. "롤라, 그거 안 해도 돼요." "롤라,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롤라 그건 애들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때마다 알았다곤 했지만 금세 다시 롤라가 해버렸다.
롤라가 부엌에 서서 식사를 하거나 내가 방에 들어서면 갑자기 긴장하면서 청소하기 시작하는 모습들이 거슬렸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하루, 롤라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아버지가 아니에요. 롤라도 이 집 노예가 아니고요." 그렇게 운을 뗀 후 롤라가 여태껏 하던 '노예 같은' 일들을 쭉 나열했다. 롤라가 깜짝 놀란 걸 깨달은 나는 깊은숨을 쉬고 롤라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갈 곳 잃은 듯 방황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엘프 같은 얼굴을. 난 롤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롤라, 여기는 롤라의 집이에요. 우리를 위해 일하려고 있는 게 아니에요. 편히 쉬어도 돼요. 알았어요?"
"그래,"라고 대답한 롤라는 다시 청소를 하러 갔다.
롤라는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며 사는 법을 몰랐다. 나야말로 내가 한 조언에 따라 편히 쉬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롤라가 저녁식사를 만들고 싶어 하면, 그러도록 놔둬야 했다. 고맙다고 한 다음에 내가 설거지를 하면 되는 거였다. 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어야만 했다: 롤라를 가만 놔둬라.
어느 날 밤, 집에 오니 롤라가 소파에 앉아 낱말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TV는 켜놓고 발은 올려둔 채로. 롤라의 옆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롤라는 나를 흘끗 보더니 그 멋진 틀니를 보이며 멋쩍은 미소를 날렸다. 그러곤 다시 퍼즐에 몰두했다. 발전이었다.
롤라는 뒤뜰에 정원을 만들었다. 장미와 튤립과 온갖 종류의 난꽃이 있었다. 롤라는 오후 내내 정원을 가꿨다. 동네를 산책할 때도 있었다. 롤라가 80세쯤 되자 관절염이 생겨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했다. 주방에서는 '튀김 전문 요리사'에서 어느덧 '요리 장인'이 되어 요리할 기분일 때만 요리를 했다. 롤라는 풍성하게 한 상을 차리고선 우리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롤라의 방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종종 필리핀 전통 음악 테이프 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같은 테이프가 반복됐다. 우리 부부는 롤라에게 일주일에 200달러씩 줬는데, 롤라는 그 돈을 모두 고향 친지들에게 보냈다. 어느 날 오후, 뒷베란다에서 누군가가 보내온 고향 사진을 보고 있는 롤라를 발견했다.
"롤라, 집에 가보고 싶어요?"
롤라는 사진을 뒤집어 뒷면에 적힌 글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다시 사진을 돌려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는 듯했다.
"응."
롤라의 83세 생일이 지나자마자 고향행 비행기표를 끊어줬다. 한 달 뒤엔 내가 필리핀으로 갔다. 롤라가 원한다면 미국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 겉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이 여행의 목적은 그토록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그곳이 지금도 집처럼 느껴질지 한번 보는 것이었다.
롤라는 답을 찾았다.
"모든 게 예전같이 않았어." 마얀톡 근처를 함께 산책하다 롤라가 말했다. 옛날에 있던 농장, 롤라가 살던 집 모두 없어졌다. 롤라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들도 대부분 이제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 중 그나마 남아있는 친구들은 낯설게 느껴졌다. 만나게 되어 좋긴 했지만... 모든 게 예전 같진 않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싶긴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롤라는 말했다.
"그럼 롤라가 만든 정원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됐네요." 내가 말했다.
"그래. 다시 집으로 가자."
롤라는 나와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딸들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먹을거리를 만들어줬다. 나와 내 아내(특히 나)와는 다르게 롤라는 아이들의 학교 행사나 공연의 매 순간을 즐겼다. 아무리 즐겨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롤라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았고, 기념으로 프로그램지를 꼭 챙겼다.
롤라를 행복하게 하는 건 쉬웠다. 가족여행을 함께 가기도 했지만 롤라는 언덕 아래에 있는 농산물 시장에 갈 때도, 가족여행을 떠날 때도 똑같이 신난 모습이었다. 마치 소풍 온 아이가 눈이 휘둥그레지듯, "어머 이 호박 좀 봐봐!"하고 외쳤다. 매일 아침 롤라가 하는 일은 집안의 모든 블라인드를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창문 하나하나마다 잠시 멈춰 바깥을 바라봤다.
또 롤라는 스스로 글을 읽는 법을 익혔다. 놀라운 일이었다. 수년이 지나면서 롤라는 글씨를 보고 조금씩 발음하는 법을 익힌 것 같다. 롤라의 방에는 단어 퍼즐 책자가 잔뜩 쌓여있었는데, 뒤섞인 알파벳 사이에서 단어를 찾아내는 퍼즐을 맞췄다. 퍼즐 책자엔 온통 연필로 동그라미를 친 흔적이 남아있었다. 롤라는 매일 뉴스를 시청하면서 자기가 아는 단어들을 짚어냈다. 그러고 나서 신문에 나온 단어들과 대조해보며 의미를 파악했다. 그러더니 매일 신문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샅샅이 훑어 읽게 됐다. 아버지는 롤라가 단순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만약 롤라가 8살 때 논에서 일하지 않고, 대신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었다.
롤라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던 12년 동안 나는 롤라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롤라의 인생 이야기를 엮어보려고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롤라는 이런 내 습관을 신기해했다. 내가 질문을 던지면 롤라는 종종 "왜?"라는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왜 롤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싶은 건지, 톰 중위를 만난 경위가 왜 궁금한지.
내 동생 링을 시켜서 롤라의 연애사도 캐물으려고 해 봤다. 링이 물으면 롤라가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링은 낄낄 대고 웃었다. 내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하루는 롤라와 함께 장 본 것들을 정리하다가 불쑥 질문을 내뱉었다: "롤라, 혹시 누군가와 로맨스를 즐긴 적은 없어요?" 롤라는 미소 지으며 단 한 번 있을 뻔했던 로맨스 이야기를 해줬다. 롤라가 15살 때였다. 인근 농장에 페드로라는 잘생긴 남자아이가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둘이 나란히 함께 쌀을 수확했는데, 하루는 롤라가 볼로(베는 도구)를 떨어뜨렸다. 페드로는 즉각 볼로를 주워서 롤라에게 다시 건넸다. "그 아이가 좋았어, "라고 롤라는 말했다.
침묵.
"그래서요?"
"그러곤 저기 옆으로 갔지," 롤라가 말했다.
"그러고요?"
"그게 다야."
"롤라, 혹시 성관계 가져본 적 있어요?" 질문을 던지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롤라가 말했다.
롤라는 개인적인 질문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난 그냥 카툴롱이지,"라고만 했다. '난 그냥 노예지.' 어떨 때는 내 질문에 한두 단어로만 대답할 때도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알아내는 것도 스무고개 놀이를 하듯 며칠이나 몇 주에 걸쳐 이뤄졌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알아낸 것 몇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롤라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잔인하게 굴었던 엄마에게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그리워했다. 롤라가 어렸을 땐 가끔 너무 외로워서 그저 우는 일 밖에 없었다. 또 롤라가 한때 남자와 함께 있는 걸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밤에 큰 베개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알았다. 하지만 노년의 롤라가 나에게 해준 말은, 엄마의 남편들과 그 오랜 시간 함께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엄마와 함께 살았던 그 남자들이 전혀 그립지 않다고 했다. 만약 필리핀 마얀톡에 남아 결혼하고 롤라의 자매들처럼 가족을 꾸리고 살아갔다면 롤라의 삶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나빠졌을 수도 있었다. 롤라의 두 여동생, 프란치스카와 제프리아나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남자 형제인 클라우디오는 살해당했다. 롤라는 이제 와서 인생이 달랐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롤라를 이끄는 원칙은 '바할라 나(Bahala Na)'였다.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롤라에게 닥친 시련은 다른 종류의 가족이었다. 이 가족에서 롤라는 자녀가 여덟이었다: 엄마, 나와 우리 4남매들, 그리고 나의 두 딸들. 롤라는 이 여덟 명이 자기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줬다고 했다.
롤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심장마비는 부엌에서 시작됐다. 롤라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심부름을 나갔다. 내가 돌아왔을 때 롤라는 심장마비를 겪고 있었다. 몇 시간 뒤, 병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가 채 파악하기도 전에 롤라는 숨을 거뒀다 - 오후 10시 56분이었다. 엄마와 같은 날, 11월 7일에 떠났다는 사실을 온 가족이 알아채긴 했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진 알지 못했다. 엄마와 롤라는 12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롤라는 86세까지 살았다. 아직도 들것에 실린 롤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갈색 피부에 어린아이 만한 체구의 이 여성을 들것에 든 채로 서 있던 의료진을 본 기억이 선명하다. 이 사람들은 이 여성이 살아온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 대다수의 삶을 이끄는 자기 실속용 포부나 야망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과 전적인 충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의 소중한 일원이었다.
다락방에 둔 롤라의 상자들을 하나씩 펼쳐보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언젠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될 때를 대비해 70년대 잡지에서 오려낸 요리 레시피가 있었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채운 앨범. 나와 내 형제들이 초등학교서부터 받아온 상장들. 대부분은 우리가 버려버린 것을 롤라가 "세이브"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밤, 상자 밑바닥에서 누런 신문 기사 조각들을 발견했을 땐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내가 오래전에 쓰고 잊었던 것들인데, 롤라는 당시 글을 읽을 줄도 몰랐으면서 챙겨놨던 것이다.
대나무와 널빤지로 만든 집들이 줄지어 있는 한가운데,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지은 작은 집 앞에 두즈는 차를 댔다. 녹색으로 물든 논이 집이 모인 구역을 둘러싸고 끝없이 펼쳐졌다. 내가 트럭에서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두즈는 낮잠을 자려고 좌석을 젖혔다. 난 토트백을 어깨에 걸고 숨을 들이마신 뒤 차 문을 열었다.
"이리로 오세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짧은 길을 따라 콘크리트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내 뒤를 따라 20여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대부분은 노인이었지만 젊은이들도 있었다. 모두 집안으로 들어오자 다들 벽을 따라 준비된 의자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난 그대로 서 있었다.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작고 어두운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흘끔 쳐다봤다.
옆 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라는 어딨어요?" 다음 순간, 실내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미소를 띤 채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롤라의 조카, 에비아였다. 이 곳은 에비아의 집이었다. 그녀는 나를 포옹한 뒤 다시 물었다. "롤라는 어딨어요?"
나는 어깨에 맨 토트백 끈을 풀어 가방을 에비아에게 전해줬다. 그녀는 아직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가방을 받아 살며시 쥔 채 나무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에비아는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상자를 꺼내 이쪽저쪽을 살폈다.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롤라는 어딨어요?" 이 지방 사람들은 가족들을 화장하는 경우가 잘 없다. 에비아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녀는 상자를 무릎 위에 놓고 허리를 숙여 상자 뚜껑에 이마를 댔다. 난 처음에 에비아가 (기뻐서) 웃는 줄 알았는데, 곧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깊고 애절한 통곡 소리를 토해냈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듯, 내가 예전에 롤라에게서 한 번 들어본 그 소리였다.
내가 롤라의 유골을 곧장 이 곳으로 가져오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확신이 없어서였다. 이 곳에 롤라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정도 슬픔이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내가 에비아를 달래주기도 전에 부엌에서 한 여성이 달려와 에비아를 끌어안고 함께 통곡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 전체가 울음소리로 폭발했다. 노인들은 - 그중 한 명은 맹인이었고, 몇몇은 이가 없었다 - 감정을 자제하지 않고 모두 울고 있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다. 나는 이 분위기에 강하게 사로잡혀 내 얼굴에도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점차 울음소리는 줄어들었고 다시금 조용해졌다.
에비아는 코를 훌쩍이며 이제 밥 먹을 시간이라고 했다. 다들 부은 눈으로 부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현듯 분위기가 밝아지면서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듯했다. 벤치 위에 놓여있는 빈 토트백을 보자니 롤라가 태어난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온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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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or's Note |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을 필리핀에서 보낸 터라 이 이야기가 유독 와 닿는다. 위 저자의 이야기처럼 우리 집에는 고향을 떠나온 가사도우미 '아떼(Ate/필리핀 말로 언니라는 뜻)'들이 있었고, 나와 동생들은 엄마와 아떼의 손에서 자랐다. 아떼들은 부엌 옆 아떼 방에서 지내면서 집안일도 하고 아직 많이 어렸던 동생을 돌봐주고 엄마를 도와 밥도 차리는 그런 일들을 했다. 아떼들은 월급을 받으면 꼬박꼬박 고향으로 보냈고 남은 돈으로 가끔 필리핀 인스턴트 라면하고 통조림을 사 왔다. 그 맛이 궁금해서 옆에서 쫄랑거리다가 한 입씩 얻어먹기도 했다. (엄청 맛있었다) 아떼들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고향에 휴가 다녀오겠다고 한 뒤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새 아떼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하루는 내가 동생 분유를 타겠다고 나섰다가 보온병 조준을 잘못한 나머지, 젖병을 들고 있던 손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온 아떼 빅키는 깜짝 놀라서 자기가 아는 '민간요법'이라며 식초를 내 손에 부었다. 당연히 나는 자지러졌고 동생을 눕힌 뒤 뒤따라온 엄마는 기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리핀 시골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아는 게 없어 그랬던 것 같다. 시골에서 공부는커녕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으니 말이다. 결국 도시로 나와 남의 집에 들어가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던 아떼들의 상황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떼, 카툴롱, 카삼바하이...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이들의 역사는 길었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이해되고 공감되면서도 답답하고 먹먹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아떼들이 생각났고 이제 그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떼 빅키는 네 번째 손가락인가 새끼손가락인가가 잘려있었는데, 옛날에 어디서 일하다가 다쳤다고 했던 기억이 나고... 아떼 알세냐는 땀을 흘리는 내게 수건을 등 쪽 옷 안으로 끼워 넣어 목 뒤로 빼서 걸어놓는 '필리핀식' 땀 흡수법을 해줬던 기억도 난다. 뽀송뽀송함을 유지하기 위한 비법이었는데, 아떼들이 돌봐주는 집 아이들은 그렇게 많이 하고 다녔다. 다들 유독 정 많고 긍정적이고 성품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악용당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스쳐 지나간다. 부디 잘 지내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