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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Sep 07. 2021

6호선 아저씨의 들리지 않는 혼잣말

누구나 자신만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6호선을 타면 가끔 보이는 한 아저씨가 있다.

어딘가 불편한 듯 약간은 덩치가 있는 몸을 천천히 구부리며 지하철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무릎 위로 종이를 한 장씩 돌린다. 아무 말도 없이.

A4 용지 반만한 크기의 종이에는 아저씨가 지적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인 사랑의 집에 지내고 있다는 것, 담배 한 갑 가격도 안 되는 단 돈 2000원이면 사랑의 집 식구들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있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종이를 눈으로만 흘긋 보고 말거나 무릎 위에 놓인 종이가 투명 종이인 것 마냥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둔다. 그저 이어폰을 꽂은 채로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볼 뿐이다.

잠시 후 지하철 한 칸을 다 돈 아저씨는 다시 순서대로 종이를 수거해간다. 종이와 함께 2000원을 쥐어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종이를 가져간다.

내가 지금까지 마주했던 아저씨는 그렇게 묵묵히 종이를 무릎 위에 두고, 다시 걷어가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었다.


적어도 ‘그날’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도 합정역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6호선에 올라탔는데, 아저씨가 오랜만에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으로 저 끝에서부터 종이를 돌리고 있었다.

늘 그랬듯 괜한 민망함에 무릎 위 현실은 남 일로 치부해버린 채 스마트폰 속 세상에 더 집중했다. 다시 종이를 수거할 때 두 손으로 건네드리는 정도가 내가 그나마 베풀었던 친절함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저씨는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고 지하철 중간 문을 열려다가, 갑자기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그대로 문에 기대어 팔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란스러웠던 건 아니다. 아마 다른 쪽 끝에 있는 사람들은 들릴까 말까 싶은 미세한 소리로 한탄 섞인 말들을 중얼거렸다. 발음이 부정확해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저씨의 눈물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사실 난 그전까지 아저씨의 종이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 쓰인 말들이 정말 사실일까? 요즘 누가 현금을 갖고 다닌다고, 차라리 계좌번호 라도 쓰시지. 그럼 몰래나마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방법일까? 그런데 요즘 이런 거 불법은 아닌가?’


하지만 산만한 몸집과 담담한 표정 뒤에 숨겨져 있던 아저씨의 무력감을 처음으로 마주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쏟아지던 머릿속에 적막이 흘렀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내가 겪어온 삶과 환경이라서 가능한 것들을 아저씨의 삶에도 강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며 한가로운 비판만을 해왔던 나와 달리, 아저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최소한 그의 세상에서는 버거운 무언가와 싸워 이기고자 하는 듯해 보였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막연히 들리는 아저씨의 슬픈 혼잣말이 그 어떤 명확한 단어나 문장보다 날카롭게 마음에 꽂혔다. 본인만의 방식대로 겨우 살아내고 있는 타인의 삶을 안일하게 평가한 나를 꾸짖는 듯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잠시 동안 아무도 듣지 못하는 혼잣말로 서러움을 내뱉고는, 팔로 얼굴을 한 번 훔쳐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칸으로 나아간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지하철 한 칸 정도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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