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늘 멀찍이 서있었던

첫 번째 이야기

by 다니

내 인생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처음 실감한 건, 9살이라는 꽤 이른 나이였다.


며칠 동안 아빠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엄마의 불안한 표정, 며칠 후 아침밥을 먹던 중 걸려온 전화를 받고 무너지던 엄마의 뒷모습.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것이 처음 마주한 죽음의 징조였다.


사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필름처럼 어떤 장면들만이 남았을 뿐. 내 기분이 어땠는지, 슬프기는 했는지, 남은 우리 가족들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뇌리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아직도 어릴 적 집 전화번호나 아빠의 차 번호조차 또렷하게 읊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기억력이 원래 나쁜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시기는 흐릿한 잔상만 있다. 교통사고라는 딱딱한 이유와 장례식의 서늘한 공기 정도, 어린 나에게는 하등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어물쩡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주변 사람들의 슬픔이라는 후유증이 남았다. 엄마는 물론, 그 옆을 지키던 친척들도, 같이 살던 사촌 언니도, 날 가만히 안아주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마저도. 한동안 다들 울기만 했다. 어찌할 도리도 없는 우울한 광경이 지겨웠던 걸까. 정작 나는 슬퍼하기보다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웨딩피치 비디오 같은 거나 보면서 잠시라도 이 상황을 잊었으면 했다. 누군가 위로를 건네면 왠지 자존심이 상해 반감이 들었다. 괜히 더 씩씩한 척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타인의 동정을 유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장 가까웠던 아빠의 죽음조차 너무 먼 풍경처럼 느껴져서였을까? 그 이후에도 가까웠던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할 일이 있었지만, 나는 늘 이방인처럼 서서 슬픔이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10대에 우리 반 친구의 갑작스러운 장례식에 갔을 때도, 20대에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애도의 감정은 당연히 있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 내게 죽음이란 그랬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래서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한 적은 없는 일.


작년, 또 다른 가족을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카와의 이별은 달랐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내 눈앞에서,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그제야 알았다. 나에게 죽음이 먼 풍경이었던 이유는, 그 시작과 끝을 용기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처음 마주한 죽음에는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부재했다. 갑작스러운 징조와 어린 나에게 쉬쉬하는 듯한 애매모호한 분위기만 남았다. 그런 흐름에 동참해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외면하고 괜찮은'척' 하기 바빴을 뿐, 그 이후에 오는 마음의 무게와 공허함을 온전히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뒤이어 마주했던 다른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도 한없이 슬퍼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한 생명체의 삶을 깊게 바라보면서, 이제야 처음으로 그 마지막 순간을 제대로 맞이해 본 사람이 되어 쓰는 이야기.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라 망설였지만, 그 틈에서 느낀 소중한 감정의 결을 남겨두고 싶어 이곳에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