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Oct 27. 2020

김치 삼겹살과 소주 한 잔의 위로

[단편에세이] 정체모를 무기력에 빠진 그대에게


"김 매니저, 이거 이렇게 하게나."

"왜요..?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그냥 처리율 챙겨야 하잖아. 이 방법으로 하게."

"이렇게 하면 몇 번씩 일을 해야 하잖아요.
안되면 누구 책임이 될 거며,
너무 비효율적인데 제가 떠맡아야 하고, 못하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하게."



 기성세대의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업무 방식은 언제나 나를 지치게 한다. 하루의 시작에서 이런 말다툼이 벌어지면 종일 피곤해진다. 더욱 일하기 싫게 무기력해지고 굳이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든다.



하지만 상사의 지시기에 피할 수 없다. 다른 직원들에 비해서 나는 할 말도 하고 거절도 하는 스타일이지만 막무가내식 지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나는 이해가 안 되는 상태로 업무를 이어 나가고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이런 날 김치 삼겹살에 소주가 생각난다. 친한 사람들과 하소연하면서 소주 한 잔 기울이고, 공장 얘기 그만하자며 한 잔 더, 실없는 웃음과 함께 의미 없는 말들을 반복하는 것 또한 일상의 행복이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이 근본적인 무기력을 해소해주진 못한다.












 오늘부터 시어머님이 일이 있어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우신다. 집에는 시아버님과 시누만 남는다. 어머님이 차려주는 밥상이 습관이 된 아버님과 시누가 외며느리로서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밥을 차려드려야 하나?', '나도 일하는데 그냥 알아서 드시게 내버려둘까?' 이럴 땐 꼭 착한 며느리병이 돋는다.



집에 가서 남편과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챙겨야 하기도 했고,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회사에 당분간 칼퇴근을 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초과근무라도 하고 퇴근하면 아이들은 밥을 굶고 있을 테니 당연한 처사였다. 남편에게도 말했더니 다행이라며 기쁜 내색을 비추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상사와의 마찰이 생기고, 후임의 사고가 연달아 터지니 심리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친한 동료와 삼겹살이나 먹을까 생각했다. 사실 시댁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자 하는 도피의 마음도 있었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오늘 애들 데리고 가서 삼겹살 먹고 올까?"

"여보.... 좀...."

"왜....?"

"알아서 해라."



남편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이들을 두고 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 대체 왜 반응이 안 좋은 건가 이해할 수 없어 혼자 생각하다 말했다.



"뭐가 싫은 건질 말해봐. 아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놀러 다니지 말고 자기계발 하라는 거잖아. 휴... 내 심정을 말해도 모를 거야. 알겠어."

"시간이 없다면서 놀건 다놀고 너무 상반되지 않아? 시간 없다고 너 배려해줬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그래."



남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8월 말부터 당장 저번 주까지 나는 자기 계발과 N잡, 블로그 운영에 온 신경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었다. 나름 내 삶에선 최선을 다했지만 가족의 배려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맞아, 시간이 없었고 이제 시간이 좀 났어.
사실 너무 달리기보다 쉬엄쉬엄 하고 싶은 마음이 커.
8월부터 당장 저번 주까지 쉴틈 없이 달렸잖아.
그래서 지친 마음도 있고 그래.

일하다가 스트레스받은 게
김치 삼겹살에 소주로 모두 해소되진 않겠지.
근본적인 게 나아질 것도 아닌 거 알아.

근데 가끔씩 그렇게 지성보다 본능에 끌릴 때가 있어.
네가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내가 뭐가 힘들겠냐 말하면 할 말 없어.
그냥 내가 혼자 생각이 많고 내 한계점이 남들보다 낮은 가봐.
이해해 달란 건 아니야. 다름을 인정해달라는 것뿐이야.











 김치 삼겹살과 소주 한 잔이 쏘아 올린 공, 결국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번졌다. 남편은 나의 장문의 글을 보고 알겠다는 대답만 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고 무기력해져 있었는데 남편과의 대화로 조금 정리가 됐다.



요 며칠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정신과를 다니면서 공황장애 약과 기분장애 약을 먹고 있는데 부작용인지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더 심해졌다. 수년간 약을 복용했던 결과, 새로운 약을 접할 땐 부작용이나 적응을 위한 증상들을 견뎌야 효과가 드러난단 걸 알고 있다. 그 인고의 시간을 지금 겪고 있구나 생각하고 나의 감정을 묵인했다.


남편과 얘기를 하다 보니 이렇게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약 때문에 그렇겠지 치부했던 나의 감정들이 '그게 아니야!'하고 소리치고 있구나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충분히 힘들고, 지치고,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들을 겪었다. 그걸 내가 몰라줬다.



첫 번째로 아까 말했듯이 너무 바쁘게 달려왔다. 삶에서 페이스 조절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난 페이스 조절에 약하다.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초반부에 실컷 달렸다가 지치곤 한다. 지금은 지친 상태다. 충분한 휴식을 누리고 다시 달려야 한다. 그런데 이 휴식 조차 나에게 사치로 느껴지고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너무 잘 알지만 이런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이기에 스스로 상처 주지 않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곤충이 변태 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라는데, 사람이 20년 이상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는 것 또한 어떨까. 나는 그 과정 속에 있다.



두 번째로 말하기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즘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 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친한 동료가 퇴사를 한다. 꿈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 또한 꿈을 찾아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 꿈을 응원했고, 격려했다. 그런데 갈수록 이 관계에서 잡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남아있는 입장이고 동료는 떠나는 입장이다 보니 회사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나는 해결하기 바쁘고 동료는 난 떠날 사람이라 외치기 바빴다. 나의 입장에서는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유종의 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매사에 '난 떠날 사람이니까'를 외치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가 아니라 상처로 다가왔다. 그렇게 돈독했던 관계가 배려 없는 말로 무너지겠구나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동료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이기엔 버거운 언행이었다. 배신감과 서운함으로 뒤덮인 이 트러블은 워낙 소중하고 애틋했던 관계였기에 나의 기반을 흔들었다. (물론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니고 아직도 애틋하고 소중하다.)



세 번째로 그냥 삶이 각박하다. 남편이 군 복무 중이고 나의 급여로 4인 가족이 먹고사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온통 어떻게 월급 외로 돈을 벌어야 할까 고민 속에 있다 보니 조급함이 자연스레 피어오른다. 거기서 제2의 삶을 계획하고 계발하고 있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온 신경을 쏟다 보니 자연스레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체력이 고갈되어갔다.






 충분히 아플 수 있는 상황이고, 충분히 힘들 수 있는 상황이고, 충분히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걸 내가 몰라줬다. 이렇게 풀어놓고 결론짓는 것 또한 합리화가 아닐까 수많은 날을 고민했다. 하지만 피어오르는 감정에 합리화는 없다. 오히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합리화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거친 말로 포장을 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꾹꾹 눌러 담아두기도 한다. 그런 행동은 마음에 독이 된다. 나의 감정들이 왜 피어올랐는지 바라봐주고, 관심 가져주고, 어르고 달래주어야 감정이 사그라든다. 묻어둔다고 절대 해소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나에게 김치 삼겹살과 소주라는 것이 감정을 눌러두는 방안이었을 수도 있다. 솔직한 감정을 바라보기 싫어서 실없는 대화와 알딸딸한 분위기로 감춰놨을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생각하면 지치고 다친 감정들을 위로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집안일로, 인간관계로, 회사 일로 지친 나를 달래주는 묘약이 그것일 수도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내가 내 감정을 알고 있느냐 없느냐이다. 내 감정을 충분히 애도하고 이해하며 김치 삼겹살을 선택했다면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었겠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합리화하기 바빴다면 그건 묻어두려는 거고 감정이 점점 부패해 상한 악취가 풍겨 나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또 내 감정을 글을 통해 읽는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나의 글을 통해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나의 퇴근길 소주  잔이
나를 묻어두는가,
나를 위로하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정적이 싫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