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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Jan 22. 2023

너무 늦은 게 아니면 좋겠다.

오늘은


사 년 전 혼자 제주에 갔을 때 였다,

고내리에 숙소를 정했고 아침 산책으로 애월항까지 걸어갔다 오고는 했다.

1인 소파에서부터 책상의자, 식탁의자 등 집에서 안 쓰는 의자들을 모아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자가 그 날은 비어있었다.

잠깐 정자마루 바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풍경이 환상이었다.

그 때, 모자를 쓴 머리보다 조금 높은 배낭을 멘 노인이 정자에 짐을 내려놓았다.

몇 걸음 뒤에 그의 아내인 듯 보이는 어르신이 이어 도착했다. 

옷차림은 여행객인데 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이상했는지 나를 보며 올레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고 그냥 있기 머쓱해서 올레하시는 중이냐고 되 물었다.

정자 난간을 등받이 삼아 자리를 잡은 노인은 할 말이 많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난 그냥 딱히 할 말이 없어 물었을 뿐인데.

시동생 넷을 키워 출가 시키고 

작년에 아이들까지 독립을 하고 아픈 노모를 모시는 중이었는데 

지난봄에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마침내 홀가분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올레를 시작했는데 벌써 스탬프북 하나를 완성해서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이 번이 두 번 째라고 했다.

아! 그러시냐고, 대단하시다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는데 눈은 자꾸 절룩거리는 그의 다리로 쏠렸다. 

그러다 결국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묻고 말았다. 

주섬주섬 걷어 올린 바지 아래로 친친 감은 무릎 보정 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많이 아팠는데 걸으니까 괜찮아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은 다음 해에 일어났다.

그 해에는 K와 함께 제주에 갔었다.

그 분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도 올레 전 구간 도전을 해보자고 했었다. 

명분만큼은 거창해서 올레를 마치고 나면 산티아고에 가자고 했다. 

K는 거의 매일 전 구간을 차곡차곡 걷기 위해 숙소를 나섰고 

나는 이틀에 한 번 이거나 꼭 가보고 싶은 좋은 풍경의 코스만 따라 나섰다.

그 날은,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인 5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구간도 있었고 처음 걸어보는 것 같은 곳도 있었다.

첫 올레의 기억이 삽화처럼 각인 된 공천포를 막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맞은편에서 노란색 등산 재킷을 입은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작년에 만났던 그 어르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설마 잠깐 스쳤던 얼굴을 기억할까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 작년에 애월에서 만났던....”

“그러네, 아유 이게 웬일이래.”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이미 스쳐 지나간 올레꾼 중에 할아버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그 사이 어르신의 걸음은 더 느려진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또 만나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얼결에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을 보내 달라며 전화번호까지 받은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사진은 보냈지만 이후로 톡을 하거나 통화를 한 적은 없었다.



설날에 조조영화를 봤다.

그것도 전 날에 이어 이틀 연속.

도로에는 차가 없었고 커피 드라이브 스루는 일사천리 통과였고 영화관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추석에는 무려 캠핑을 갔었다.

기름 쩐 내가 나도록 전을 부칠 일도 없고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만두를 빚을 일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명절 증후군을 겪을 일은 없어진 거다.

여행을 해도 되고 하루 종일 낮잠을 자도 뭐랄 사람이 없다.

문득 애월에서 만났던 노인의 붕대를 친친 감은 무릎이 떠올랐다.

걷는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노인은 해맑게 웃으며 J항공에 가입을 하니 해마다 최저가 항공권 안내가 온다며

항공요금도 싸게 할 수 있고 이만 원짜리 숙소에 머물면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슬프게 들렸던 이유를 오늘에야 알 것도 같았다. 

공천포에서 다시 만났다 헤어졌을 때

저만치 멀어지는 두 분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던 이유까지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홀가분해지는 만큼 외로워진다는 말인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은 텅 빈도로가 한적해서 좋고 주문과 동시에 커피를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입구 제일 가까이 차를 세울 수 있는 널널한 주차장이 매우 마음에 든다.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가끔 멕시칸 음식도 먹고 캠핑을 하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니면 좋겠다. 

이런 단조로운 평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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