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하고는 당분간 그렇게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2주 만에 만난 상담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혼자서 일주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고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이곳저곳 가야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아침에 늦잠도 자고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 드라마 한 시즌을 다 보고
글도 쓰다가 편의점 김밥과 컵씨리얼로 아침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는 여행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잘했다고 했다. 그런 여행 좀 더 자주 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딸이 왔을 때
지금 네가 불편하지 않게 거리 두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물었더니
“언제까지 해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때가 아닐까?”
“......”
“전화해도 될까? 가도 될까? 그런 생각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할 수 있어야겠지.”
마음 안에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안에서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라는 불안감이 일렁거렸다.
그 얘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K2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그림책방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아이나 보는 책’ 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동화책 중 노란색 표지에
서로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엄마와 아이의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그림책을 넘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당황해서 황급히 다른 책을 가지러 간다며 자리를 피했다 돌아 왔더니
내가 어디 멀리 가냐며, 이제 영영 못 보냐며 K2가 의연하게 말했다.
실제로 아이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신혼집을 꾸렸다.
일을 하느라 생각처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냥 거기 있으려니 하니 마음은 놓였다.
그러다 사위직장 발령으로 갑자기 지방으로 가게 됐다.
처음으로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셈이다.
떨어져 지내게 되니 딸에게 심리적으로 많이 의지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로 오빠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나나 K2나 결국 k장녀였다.
K장녀라는 말 때문에 비로소 나와 엄마와의 상황에 대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엄마의 물리적인 자리를 오빠 집에 만들어 놓고 마음의 자리는 내가 채워주기를 바란 것이다. 오빠 집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마가 가진 것을 오빠에게는 모두 주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라 그랬는지 당연한 거라 여겼는지 마음의 자리를 채워달라는 내게는 한없이 인색했다.
인색할 뿐 아니라 틈틈이 상처를 주기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줄 알았다.
K2가 인생의 중반을 넘게 살고 나서 나처럼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곱씹으며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내 엄마처럼 딸의 상처에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감정을 의존하지도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져 먹기도 했다. 이 다음에 내가 세상에 없을 때라도 엄마를 떠올리면 좋은 기억들만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니었나보다.
떨어져 살게 되면서 여러 상황들에 더해 불안증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 안에는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인간관계라
주변 모든 사람이 어렵고 조심스러운 중에 한 때는 K와 K2가 예외였던 것이 사실이다.
K가 묵묵히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역할이었다면 K2는 나도 몰랐던 내 안까지 훤히 들여다보며 필요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아이였다.
그러느라 힘들었을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가 주는 감동에 취해 정작 엄마가 딸을 보듬어 주지 못한 셈이다.
“그 말이 왜 불안했어요? 너무 멀어질까봐? 상처받을까봐?”
“배려와 무관심의 경계를 잘 모르겠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는 내 엄마를 닮아버렸지만 아이는 나와 다르다.
아이는 나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고 겁먹지 않으며 지난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