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재작년이 된 2년 전 겨울, 제주도에서 한달을 살았었다.
작년 여름을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 질 무렵 문득 그 때의 느낌, 공기가 그리워졌다.
K에게 제주도에 가서 이 번에는 두 달만 살다 오자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 년쯤 살아보고 싶었지만 제주도에서 나는 뭘 하며 지내냐고 난감해하는 K 때문에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 번에도 K는 묵묵부답이었다.
왜 말을 하는데 대답이 없냐, 내 말 무시하냐, 사람이 대체 왜 그러냐 등
이제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럴만해서 그런가보다, 했고 말하고 싶을 때면 하겠지 싶었다.
며칠이 지난 후 K가 말했다.
“혼자 다녀와. 연세드신 어르신 있는 집들은 늘 오분대기조로 지내야한대. A알지? 그 친구도 매일 부모님 집에 들른다잖아.”
연초에 고관절이 골절됐던 시어머니가 퇴원하고 집으로 와서는 차츰 안정을 찾던 중이었는데 여름을 지나면서 화장실에서 넘어진 후 식사도 못하고 기력이 떨어지셨다고 했다.
갑자기 시어머니야 아프든 말든 놀러나 가는 무개념의 며느리가 된 것같아 무안했다.
제주도가 유럽도 아니고 무슨 일 있으면 오면 되고 또 무슨 일이 생긴들 당장 뭘 하겠다는 말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색다른 음식을 사다드리면 맛나게 드셨고 컨디션이 좋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를 물으면 마치 어제 일처럼 조근조근 얘기도 하셨다.
그러다 조금 기운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시누이 말에 의하면 아들이 오면 생기가 난다고도 했다.
K가 말한 ‘무슨 일’ 이란게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팔십구 세의 어머니는 당신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보내고 계신다.
2월 마지막 주, K도 휴무이고 나도 마침 일본어 교실이 한 주 휴강이었다.
이런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있겠느냐며 부랴부랴 부산여행을 결정했었다.
에어비엔비로 숙소부터 예약을 하고, 살아보기는 했지만 이십 년 전과 달라졌을 장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동생에게 단추를 맡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코로나 재확진이 됐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K의 큰 깨달음으로 어렵게 성사된 결정이었기에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얼마 후 작년부터 예정되었던 홋카이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은 잠잠했다.
사월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분주한 가운데 방랑 본능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며, 우리가 사는 동안 여행을 하면 얼마나 하겠냐며, 여행은 약보따리 잔뜩 싸들고 가는 게 아니라 가고싶은 마음이 있을 때 가는 거라며, 멀리 가는 게 싫으면 하다못해 캠핑이라도 가자고 했다.
어쩌면 K의 귀에 피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K가 견디다 못해 결정한 것은 다시 부산행이었다.
처음엔 단추를 데리고 차로 가자고 했다가 주차비별도에 반려견 숙박료가 하루당 삼만원씩 추가된다는 말에 계획을 바꿨다.
추억이 새록새록한 무궁화호를 타기로 하고 단추는 두고 가기로 했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K가
“취소 기록만 세 번이나 되네.”
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에어비앤비계정에 예약 내역이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작년에는 런던 이탈리아 여행을 예약했다가 취소한 적도 있었다.
혼자 가는 제주 항공권도 삼 개월 전에 저가로 예약을 했다가 막상 날짜가 다가왔을 때 무슨 일인가 생겨 위약금을 물면서 취소를 하기는 여러번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은, 계획이 계획대로 되는 상황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바로 내일 내가 뭘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십 년후에 어떤 모습일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십 년전 미국 생활을 마쳤을 때 퇴직하면 꼭 다시와서 길게 여행하자고 했었다.
그 것을 실천하려고 마음 먹은 때가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이었고 항공권을 예약하려던 찰나 어느 지역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K가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 ‘좀’이 얼마간일지도, ‘두고 보자’는 건 또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쭈굴해진 채 삼 년을 보냈다.
그리고 작년, 사는 동안 어느 순간 고비 아닌 적이 없었지만 그 중 가장 세게 온 우울증 때문에 정작 여행하고 싶은 느낌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시 여행 얘기를 꺼냈다.
인생 마지막 장거리 여행일거라 생각하니 괜히 비장해졌다.
추억 여행을 위해 미국에 갈 것인지, 이왕 비용과 시간을 들여 하는 것이니 유럽으로 할지를 고민하다가 대충 찍은 것이 런던 이탈리아였다.
런던에서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 곳에 가보고 싶었고
아직 이탈리아도 못가봤다는 K는 로마에 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귀차니즘이 점점 커졌다.
결국 위약금 시한 바로 전날 예약취소를 하고야 말았는데 아쉬움보다 안도감이 앞섰다.
K와 나는 엠비티아이가 완전히 반대인 가운데 맨 마지막 글자만 J로 같다.
부산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다 휴대폰과 지갑만 들고 새벽기차를 타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렇게 한다고 안 될 일도 없다.
사실, 엑셀로 일정을 촘촘이 짜고 잠잘 곳, 먹을 거리, 목적지, 이동수단 시간 등 미리 계획을 세운다고 꼭 그대로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지금은 모두에게 별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