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작년 겨울, 쌀을 가지러 갔던 이 후 엄마에게 가지 않았었다.
쌀은 엄마가 외갓집 동네에 있는 엄마 논에서 올라 오는 것이고 시골 쌀이라 벌레가 나네 어쩌네 하며 그러지 말고 그냥 팔아서 용돈 쓰시라고 (나는 아니고 아들들이) 한 적도 있었지만, 나는 쌀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 안오나? 하며 기다리게 되기 까지 됐다.
엄마를 보러 가지 않은 이유는 엄마를 보러 오빠네 집에 가야하는게 조심스러워서이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징하게 사추기를 겪은 이유가 죄다 어린시절부터 엄마로부터 생긴 트라우마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일단 거리를 둬 보자는 담당의사의 권유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 일찍 사고를 쳤다면 증손주도 봤을 수 있을 나이에 엄마앓이를 하는 것이 민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명절 연휴를 다 보내고 한가한 평일에 시댁에 가기로 했다.
전하고 다르게 건강식품 선물을 사자고 해서 K가 흠칫 하더니 그걸 두 개 한다고 하니까 눈이 다 휘둥그레진다.
웬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마누라님 행여 변덕 부리실까 잽싸게 포장봉투까지 챙겨 계산대로 가는 K의 발걸음이 바쁘다.
동네 공용비밀번호인 것처럼 시어머니 집 공동출입구 문 열고 현관문까지 열고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초기 치매를 앓고 계신 시아버님은 거실에서, 아는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누구신가 하는 표정으로 예의 어색한 미소를 띠며 살짝 숙여 맞이 하신다.
이번에는, 저는 며느리고요 이 사람은 K예요. 제 이름 기억하세요? 등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낯선 사람이 무작정 얼굴을 들이밀며 나는 누구고 쟤는 알겠냐며 다그치면 나라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아서였다.
그 때 방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그리고 첫 인사
“그래, 명절은 자알~ 보냈냐?”
하셨다.
사십 년 가까이 지내온 내가 아는 어머니의 그 말투는
‘아이고~ 우리 며느리 명절 보내느라 힘들지는 않았어?’
라기보다는
‘명절이라고 에미 애비도 보러 오지 않고 그래 늬들끼리 재미있었냐?’
뭐 대충 이런 뜻이라는 것은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확실했다.
결혼한지 삼 년이 됐을 때도 삼십 칠 년이 되었어도 부실한 며느리는 또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의자는 많았지만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 서 있어야 어머니 눈에 덜 거슬리려나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차례도 없으니 평소 한시간 거리를 굳이 길에 갖혀 다서 여섯시간 걸려 오가는 대신 한가로울 때 간다고 K가 여러번 말을 했는데도 서운함은 여전하신가보았다.
전에 맛있게 드셨다는 식당에 가서는 아들에게 ‘너는 왜 자꾸 여길 오냐? 맛도 없구만.’ 하시며 밥을 거의 남기고
달달한거 드시러 카페 가시려냐고 하니 됐다며 집에나 가자고 하셨다.
그래도 용돈 봉투를 드리는 순간에는 잠시 얼굴이 밝아지셨다.
어머니는 마음에 있는 말을 거르지 않고 한다.
엄마는 정작 스스로의 마음은 드러내지 않은 채 빙빙 돌리기를 잘한다.
어머니는 현금을 좋아하신다.
엄마는 걱정과 관심을 바란다.
어머니는 체중이 삼십이 킬로그램으로 기운이 없어 혼자 움직이기가 힘들지만 정신은 또렷해서 최근 일이든 오래전 일이든 세세한 것 까지 다 기억하신다.
엄마는 못 본 사이 아파트 커뮤니티에 새로 열린 노인정에 나가게 돼서인지 얼굴도 좋아졌고 자세도 바르지만 기억을 점점 잊어버린다.
동생은 엄마가 서운해하고 노여워하는 마음까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시댁에서 나와 엄마집에 갔을 때 노인정에서 놀던 엄마는 딸이 왔다는 말에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그리고는 세상 천진한 표정으로 ‘아이고~ 우리 딸 왔어. ‘ 한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또 어떤 예상하지 못한 말로 상처를 주려나 잔뜩 각오를 하고 갔던 것이 무색했다.
오래전 얘기들을 자꾸 물어보니 다 잊어버려 생각이 안 난다면서도 엄마는 몸에 밴 습관처럼 그 때 있던 일을 술술 얘기했다.
옆에서 듣던 올케가
“고모가 자주 와서 옛날 얘기하면 되겠네. 어머니가 얘기를 잘 하시네요.”
한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도 어머니도 나는 여전히 두렵고 긴장된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요즘은 조금 자주 그 분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