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분에 넘치는 엄마를 가졌네

by 이연숙



대사 하나하나가 깨알같은 작가의 그 많은 말 중 나는 하필 그 대사에 꽂혔다.

나쁘게(?) 태어난 딸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엄마에게 맡긴 후 이 나라를 떠난 주인공의 엄마는 딸을 버리느라 엄마까지 버린 셈이 되었다.

이십 년이 지난 후 여주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그라모, 보고싶제 내 엄마가 내를 시집 보낼 때...”

“아니! 할머니 엄마 말고, 내 엄마.”

“어? 어...”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음 장면에서 멀리 길 건너편에서 딸이 걸어가는 모습을 눈길로 따라가면서 애끓는 그리움에 눈물만 흘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주가 혼자말을 했다.


“엄마는 분에 넘치는 엄마를 가졌네. 열받게.”


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 순간은 자기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는 동시에 그리움이 사무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저녁이 늦었다고, 친구를 데려왔다고,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일요일에도 기어 나간다고, 네가 어디가서 사랑을 받겠냐고, 그리고 가끔은 사는 게 힘들다며 너만 아니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 등 대부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장면들만 빽빽하다.

이 여행을 하면서 바다길을 걷다가, 마을 안 길을 걷다가, 큰 도로를 그냥 목적없이 걷다가, 어떤 때는 그냥 밥을 먹다가 문득 엄마와의 한 장면들이 삽화처럼 번뜩 떠오르고는 한다.


엄마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수한 물을 걸레라도 빨게 달라고 하는 옆 방 아주머니에게


“왜 이것도 탐나? 가져 이게 아주 달아.”


라며 깔깔 웃었다.

또 엄마는 고스톱을 치다가 불리해지면 오래전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화투판을 흩트리며


“아유~ 몰라 몰라 안 해.”


라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엄마가 화장을 하고나서 화장품을 담은 바구니를 치우려고 할 때 네 살 쯤 이었을 내가, 나도 구리무 발라달라고 하자 구리무대신 빗등으로 내 눈썹을 살짝 문질러주며


“자 됐다!”


했다. 나는 정말로 엄마가 내 얼굴에 ‘미용소구리무’를 발라준 줄로 알았다.

부안여행중 백합정식을 달게 먹던 엄마, 버스를 타고 가는 나를 발돋음하면서 눈으로 좇던 엄마, 매운 바람이 많이 불던 초봄 네가 좋아하는 거 사왔다며 소꿉장 세트를 들고 대문을 두드리던 엄마. 그리고...그리고...

기억의 왜곡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환하게 웃는 장면은 그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일상에서 엄마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학교에 갈 때, 직장에 출근할 때, 집에 돌아왔을 때, 심지어 내 결혼식이 있던 날 엄마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새로 짓고 있는 성당이라 그 동네 사람이 아니면 위치를 알기 어려웠던 결혼식장에 우리 쪽 친척들이 대부분 길을 못찾아 헤매다 늦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엄마도 늦어서 신부 입장도 못봤다는 얘기는 전해들었는데 그래서 엄마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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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도에 강풍이 불고 있다.

아침산책을 나가지 말까 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옷깃 단단히 여미고 나섰다.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차도 다니지 않는다.

이 언덕길이 이렇듯 한산한 것도 처음 인 것 같다.

매서운 바람이 뺨을 한 번 치고 지나갈 때 또 엄마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오학년 쯤이었을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비비며 일어났더니 어둠 속에 엄마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구충제를 먹었는데 자꾸 속이 뒤틑리며 어지러워서 일어서기가 힘들다며 아침밥을 하라고 했다.

아침으로 밥을 했는지 반찬은 뭘 했는지 기억이 날리 없지만 새삼 궁금한 건

괴로워하는 엄마를 내가 어떻게 돌봤는지였다.

엄마를 쉬게 하고 식사를 챙기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줬을지, 아니면 졸리고 귀찮은데 왜 나한테만 일을 시키냐고 속으로 짜증이 났을지.

바람에 따귀를 맞고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외면하고 살아보기로 한 마음이 무색하게, 마음 한 편이 물에 젖은 창호지처럼 위태롭게 흐물거렸다.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려서인지 눈물 한 줄기가 예고도 없이 흘렀다.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애닲아하지도 않으리라 먹은 마음이 요즘 자주 흔들린다.

내가 분에 넘치는 엄마를 가진 것 같지도 않지만

엄마도 많이 모자란 딸을 가진 것 같다.

딸에게 나는 또 어떤 엄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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