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방이 엄마의 가방을 닮아간다

가족, 문득 그립고 때로 서러운 이름

by 이연숙
20211107가방의조건.jpg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외할머니가 유일하다.

전쟁 때 잃어버린 둘 째 아들 외에 이 남 사 녀를 둔 할머니는

자식들 집에 돌아가며 머물곤 했다.

할머니가 항상 들고 다니는 명품 무늬의 가방은 핸드백이라기에는 크고

여행가방이라기에는 조금 작은 사이즈였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건강이 나빠져 자리에 눕기 전까지 할머니는 늘 단정하게 쪽찐 머리를 했다.

외할머니를 연상하면 단아한 쪽머리와 보청기 그리고 뤼비똥 무늬의 가방이 먼저 떠오른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도 셋 째 딸인 우리 집에서는 더 오래 머물렀는데

그렇다고 할머니의 가방이 더 커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풍으로 쓰러진 후 자리를 보전하면서부터

더 이상 할머니의 가방은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즘

불현 듯 할머니의 가방 안에 뭐가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첫 조카가 생긴 후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그 이전에 엄마가 어떤 가방을 들고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시점 이후부터 엄마는 레*** 브랜드의 폴리에스터 소재 천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다녔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느 지하철 역 앞을 지나다가 문득 엄마 연배의 어른들이 모두 비슷한 가방을 크로스로 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변에 노인복지회관 있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공통점은 가방뿐이 아니었다.

효도신발, 짧게 자른 퍼머 머리도 비슷했다.

재미있는 건 가방의 브랜드나 크기도 거의 비슷한데 하나같이 빵빵하다는 점이었다.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엄마가 집에 왔을 때 물었다.


“그 쬐꼬만 가방에 대체 뭘 그렇게 많이 넣은 거예요?”

“이게 다 필요한 거다 얘, 우산 있어야지, 일주일치 약 있지......”


수첩, 볼펜, 지갑, 칫솔, 접는 장바구니, 안경, 속옷, 양말, 얇은 바람막이, 부채, 손수건, 사탕, 두유, 껌, 등등

엄마가 보여주는 가방 속에는 없는 거 빼고 다 있었다.

헤르미온느의 가방만큼이나 뭐든 나오고 뭐든 다 들어간다.

길 가다 채소든 과일이든 싼 게 보이면 사야 되니 장바구니

지하철 타면 바람이 차니 바람막이도 있어야하고

더울 때 부쳐야 하니 부채,

때도 아닌데 배가 고파지면 먹으려고 두유

사탕과 껌은 손주들 환심 사려고 항상 넣어둔다고 했다.

그러다 가방 터지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깔깔 웃었다.

한 쪽으로만 무게가 쏠려 불편하니 등에 메는 게 좋을 거라며

면세점에서 같은 천 소재 꽃무늬 백팩을 사다 줬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 가방만 메고 다닌다.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충무로, 무려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지난 여름, 신촌에 가느라 혼이 쏙 빠져 돌아온 이후

서울 나들이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무슨 가방을 들고 가야하나?


배우러 다니는 일이 많았을 때

가방을 살 일이 있으면

모양보다 일단 책이 들어가는 크기 이상의 사이즈를 찾았었다.

그렇게 장롱 안에 걸려있는 가방들은

노트북이 들어가거나 최소한 소설책 한 권쯤 들어갈 수 있는 큼직한 가방 일색이었다.

배우러 다니는 일도 없어지고

외출 자체를 하지 않게 되면서는

휴대폰과 지갑만 가방보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지하철 타고 서울 갈 때 어떤 차림으로 갔었는지 잊어버렸다.

미니 천가방에 휴대폰과 지갑만 넣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을 가야하는데 책을 넣을 수가 없다.

조금 큰 토트백에 책을 넣었다.

책을 그냥 읽을 수가 없으니 돋보기 안경을 넣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후 바람에 말리면 건조해져서 손수건도 넣어야 한다.

갑자기 기침이 나면 민폐이니 따뜻한 차를 담은 작은 보온병도 넣었다.

혹시 필요할지 몰라 이어폰, 햇빛에 눈이 따가우니 썬글라스

고민하다가 두고 가면 꼭 쓸 일 생기는 수첩과 볼펜 (들고 나갔을 때 썼던 적은 없음)

모처럼 서울 나들이인데 카메라를 챙겨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다가 과감하게 포기.

그럼에도 가방은 이미 포화상태다.

가방 본연의 모양은 간 데 없고

배만 빵빵한, 그러니까.... 어디서 봤더라?

그랬다.

내 가방이 엄마의 가방을 닮아가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