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웨어>, 화려한 공허 속 숨구멍

자식은 가족이 가족임을 가능케 하는 연결고리

by 인절미사과


최근 단편 시나리오를 하나 쓰고 있다.

아무래도 도움이 될 만한, 유사한 톤의 영화를 여러 편 보면 좋겠다 싶었고

그 중 하나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10년 작, <썸웨어>를 골랐다.


샬롯 웰스가 <애프터썬>을 만드는 데 있어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데

확실히 그러한 것 같다.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말이다.


그래도 <애프터썬>은 <애프터썬>대로,

<썸웨어>는 <썸웨어>대로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킨다.


화려한 스타의 삶 이면에 깔린 지독한 권태, 그리고 그 공허를 채우는 딸의 존재.

상업적인 흥행 요소나 거창한 서사를 배제하고,

오로지 조니라는 인물의 내면과 시선에 집중해 영화를 감상해봤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영화에 대해 단평하자면


영화는 조니가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을 버리고, 진짜 무게를 짊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조니 마르코, 남들이 보기엔 모든 것을 가진 남자.

그러나 영화는 시작부터 그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를

아주 집요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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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텅 빈 밤의 사투


조니의 시간은 밤에 멈춰 있다.

잠들어야 할 시간이 오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공허와 마주한다.

그는 술을 퍼붓거나, 쇼걸들을 방으로 불러 기계적인 춤을 추게 한다.

낯선 파티에 스며들어 누군가와 몸을 섞으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애무 도중 잠이 들어버린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성적 욕구의 해소가 아니라,

단지 이 지독한 침묵과 외로움을 메워줄 인스턴트 소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니의 상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단연 특수 분장을 위해 얼굴 본을 뜨는 씬이다.

콧구멍 두 개만 남기고 온 얼굴이 석고로 뒤덮인 채,

카메라는 미동도 없는 그를 아주 오랫동안 클로즈업한다.


그는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라는 것.


화려한 스타 조니가 아니라, 삶의 질식 직전에 놓인 한 인간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그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숨만 쉬며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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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클레오라는 닻이 내려오다.


별거 중인 아내가 잠시 딸 클레오를 맡기면서, 부유하던 조니의 삶에 무게중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물론 변화는 급격하지 않다.

딸과 함께 간 밀라노 출장에서도 아이가 잠든 사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 식사 자리에 앉는다.

그런 아빠를 바라보는 클레오의 시선은 비난보다는 무언의 질문에 가깝다.


"아빠,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 듯한 그 눈빛을 조니는 처음엔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물속에서 함께 차 마시는 흉내를 내고 썬베드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쬐는 순간들은

조니에게 그 어떤 파티보다 충만한 감각을 일깨운다.

망나니처럼 살던 그가 서서히 딸을 우선순위에 두게 되는 과정은 느리지만 설득력 있다.


영화는 그가 얼마나 텅 빈 사람이었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었기에,

그 빈 공간에 딸이 차오르는 과정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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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서진 어른들을 잇는 유일한 끈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부모로서 부족하다.

아내 레베카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딸을 맡기고 떠나버린다.

조니는 화려하지만 제 앞가림 못하는 삶을 반복 중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인한 인물은 딸 클레오라고 생각한다.

위태로운 부모 사이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묵묵히 균형을 잡는다.

하지만 캠프를 향해 가는 차 안에서 결국 클레오는 눈물을 터뜨린다.


기약 없이 떠난 엄마와, 늘 곁에 있어 줄 수 없는 아빠.

그 불안함 속에서 아이가 흘리는 눈물은 역설적으로 조니를 각성시킨다.


흔히 "애 때문에 못 헤어진다"는 말을 애처롭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아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부서진 관계를 다시 잇고,

주저앉은 어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구원일지 모른다.


그 사랑스러운 존재 때문에라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금 보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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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여백이 주는 아쉬움과 미덕


<썸웨어>의 호흡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본다.

조니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컷을 길게 가져간 의도들은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때로는 "굳이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호흡이 늘어지는 장면들이 있다.

쇼걸들이 춤추는 장면도 그렇고 차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이나 파티에서 서성이는 장면도 그렇다.

편집의 리듬을 조금만 더 다듬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샷들 또한 지극히 평이해서,

서사가 아닌 영상의 리듬과 시각적 전환과 조화에서 오는 쾌감이 덜했다.


특히 엔딩에 대한 아쉬움이 짙다.


페라리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하염없이 길을 걸어가는 조니.

그가 화려한 껍데기를 버리고 클레오라는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는 상징성은 알겠지만,

시각적인 강렬함이 부족하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진 않지만서도

차라리 레베카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변화를 명징하게 드러내거나,

조금 더 결연한 태도가 돋보이는 씬이었다면 어땠을까.


훌륭한 문학적 텍스트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지막 마침표가 조금 흐릿하게 찍힌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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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썸웨어>는 <애프터썬>이 왜 이 영화를 오마주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수작이다.


어딘가(Somewhere)를 향해 끊임없이 달리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는 멈춰 서서 옆을 보라고 말한다.

그곳에 당신을 숨 쉬게 하는 진짜 '무언가'가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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