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어느새 4월

찬 바다를 덮어주는 찬란하고 보드라운 빛

by 인절미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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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섣불리 꺼내기 조심스러운 상처를 다룬다.

4월이 되면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저릿한 그 상처.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을 차갑고 어두컴컴한 심연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부실 만큼 산란하는 부드러운 빛줄기 아래로 우리를 데려가,

기어이 따뜻한 위로의 담요를 덮어주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꺼내본 당신의 아련한 기억들과,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들이 쏟아냈던

다정한 감상들을 엮어 이 뭉클한 영화를 브런치 글로 다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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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비극 앞에서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애도의 방식


2014년 4월 16일.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라는 세 글자는

우리에게 묵직한 부채감과 슬픔을 안긴다.


선장의 몰인간적인 행동, 국가 시스템의 뼈아픈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채 바다로 가라앉은 수많은 생명들.

그 파장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거대해서, 이 사건을 다루는 창작물들은

언뜻 그 파장에 잡아 먹혀 정체성을 잃거나 버티기 위해 과도하게 경직되어 왔다.


하지만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영화는 단원고의 희생자 학생들을 모티브로 상상한 이야기지만,

참사를 고발하거나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여고생 단짝 세미와 하은의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하루를 느릿하게 따라갈 뿐이다.



*거대한 슬픔을 밀어낸 자리에 채워진 보드라운 햇볕


다리를 다친 하은은 수학여행을 가기 어렵고, 세미는 하은과 함께 가고 싶어 실랑이를 벌인다.

하은은 어떻게든 세미를 맞춰주고 싶지만 현실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세월호라는 무거운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오롯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두 소녀의 일상은 마치

햇볕이 드는 보드라운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 것 같은 아늑함을 준다.


여기에 더해 치장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열여덟 소녀들의 투명한 감정이 자연스레 차오르며 미세한 쾌감마저 선사한다.

그저 평범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이야기.

그러나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비극이라는 소재의 묵직함이

역설적으로 이 평범한 하루에 눈부신 특별함을 부여한다.



*우정을 넘어서는 본연의 감정, 그리고 절박한 시간


세미와 하은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훌쩍 넘어서는 '사랑' 그 자체다.

세미는 하은에게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치며 투정을 부리다 싸우고, 이내 다시 연락해 화해한다.

하은이 어떤 모습을 하든 세미는 하은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은 역시 그런 세미의 넘치는 감정을 조용히 품어준다.


언뜻 보면 이 둘이 서로에게 쏟아내는 감정은 과다해 보이고,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토록 감정이 넘쳤던 이유는,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다가갈 여유가 없었던 그 절박함이 빚어낸 과잉.


이러한 감독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후 하은이 겪게 될 거대한 슬픔이 단순히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라서' 느끼는 국가적 슬픔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세미'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본질적인 상실감임을 관객에게 명확히 전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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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을 넘어 우리 입안을 맴도는 빛의 메아리, "사랑해"


세미는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수학여행을 떠난 세미의 발걸음 너머로 우리가 아는 그 차가운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차가운 바다가 아니라, 따뜻하고 눈부신, 몽우리진 세미와 꽃들을 비춘다.


살아생전 원 없이 해줬어야 했던 "사랑해"라는

그 흔하고 위대한 세 글자가 엔딩을 장식한다.

엎드려 있는 세미에게서 흘러나온 "사랑해".

아주 비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주 높은 광량의 인공 빛은 두 소녀의 사랑을 꽉 껴안으며,

동시에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입안으로까지 흘러 들어와 그 사랑을 머금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당장 뛰어가 이 말을 전해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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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죽은 뒤에도 분명히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너와 나>는 잊을 수 없는 먹먹한 현실을 다루면서도,

떠난 이들을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홀로 버려두지 않았다.


가장 밝은 빛과 가장 보드라운 담요를 덮어주는 애도.

이것이 <너와 나>가 보여준, 슬프도록 찬란한 사랑의 색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