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실 거죠?”
화가는 의자를 바로 놓고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깡통에서 연필 하나를 꺼내 마치 무사가 벼려진 칼날을 살피듯 찬찬히 살펴보았다. 소영은 마련된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방금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굳었다. 남자가 아무리 똑같다, 예쁘다 해도 소용없었다.
사진이나 거울을 통해서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는 과연 얼마나 같을까.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눈으로 보듯 자신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생각보다는 나은 모습이길 바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자신을 보아주길 바랄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기를 기대했을까.
화가는 짐작보다 훨씬 젊고, 기술적으로도 미숙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억지로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장래 희망이 화가였을까. 직업이 따로 있는지도 몰랐다. 취미 삼아 하는 아르바이트일 수도 있었다.
바로 저기, 겨우 이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천재 화가가 있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거리의 화가가 있다. 그 사이에,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있다.
사각사각. 화가가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그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썼다. 야상에 목이 긴 아웃도어슈즈를 신은 그와 잘 어울리는 칼이다. 집중력이 대단해 바라보고 있자니 연필과 함께 얇게 썰려나가는 기분이 든다. 거리의 소음마저 사라졌다. 연필 깎는 소리만 간지럽게 들려온다. 그가 궁금해진 것은 순전히 그 연필 때문이었다.
“연필을 굉장히 잘 깎으시네요.”
그의 발치에는 깡통 두 개가 놓였다. 하나는 깎은 연필을 담은 깡통이고, 두 발 사이에 놓인 다른 한 깡통으로 연필찌꺼기가 들어간다.
“준비 운동 같은 거죠.”
연필을 다 깎은 화가는 최대한 편한 자세를 부탁했다. 이쪽저쪽으로 얼굴을 살펴보더니 시선을 어디쯤 두면 좋을지 일러 주었다.
“그림, 좋던데요, 저는.”
소영이 말했다.
“처음이네요.”
화가가 수줍게 웃으며 연필을 들었다.
“뭐가요?”
“칭찬이요.”
“진심이에요. 보이는 걸 그리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걸 그린다고 해야 하나. 시점이 독특해서요. 느낌이 좋더라고요.”
“재미없잖아요.”
“그럼 힘들지 않아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던데.”
“누가 자길 그려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제게는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죠. 그리고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솔직해지는 거예요. 말이나 표정으로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죠. 흥미롭지 않습니까?”
화가가 반박하듯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까 그 여성분은 마음에 안 드는 눈치던데.”
그러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에요. 다만 그림은 돌려주셔야 합니다.”
“농담이에요. 마음에 들 것 같아요.”
“이제 시작했는데요.”
화가는 부드럽게 웃었다. 눈치를 보며 웃는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다는 웃음이다. 소영은 그런 미소를 알고 있었다. 감출 것이 없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림, 좋아하세요?”
그가 물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요?”
소영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림을 전공하진 않았습니다. 대학은 안 갔어요.”
“안, 갔다?”
“수능을 안 봤으니까 안 간 거죠.”
“인사동은 언제부터 나온 거예요?”
“올 봄쯤?”
“그럼 이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그렸죠.”
대학에 가지 않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곧 실패한 삶이었으니까. 갑자기 할 말을 잃어 가만히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 절이 몇 개쯤 있을 것 같아요?”
“글쎄요. 동네에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정확히는 저도 모르지만, 문체부에 등록된 절만 구백 개가 넘더라고요.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그림으로 보시하고 공양하고 그러면서 한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다행히 쫓겨나진 않았어요. 다들 처음엔 팔짱을 끼고 그래 한번 그려 봐라 했지만 그림을 보고 나면 저절로 팔짱이 풀어졌죠. 스님 한 분이 꾸려가는 암자에서 일을 도우며 겨울을 난 적도 있어요. 제대하고 나서 두 해를 그렇게 보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를 갔다면 스물네댓 살 정도로 소영과는 열 살가량 차이가 났다. 마냥 어리다고도, 나이가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요?”
“평일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은 보시다시피. 초상화 일은 아는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죠.”
“선생님?”
“고3 때 잠깐 화실을 다녔었거든요.”
“아. 화실을 다니긴 했구나.”
“다니긴 다녔으니까 다니기는 한 건데, 다녔다고 하자니 다녔다고 하기에는, 뭐랄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요.”
“긴 얘기 좋아해요. 혹시 방해가 될까요?”
“방해가 된다기보다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화가는 끝까지 캔버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캔버스에 속한 그의 세계는 이미 현실을 벗어났다. 그가 보고 있는 세계 또한 현실 밖에 있었다. 연필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교량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