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이 소년 (2/4)

by 걍마늘

그 연필은 학창 시절의 마지막 여름에 홀연히 나타났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화실로 올라가 에어컨 앞에서 손부채를 부치고 있는데 이젤에 놓인 연필이 눈에 띄었다. 본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치우려는데 자꾸 눈길이 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깔끔함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연필을 보고 감탄한 적은 처음이었다.

소영은 자기 것인 양 연필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홀린 듯이 그 연필로 아리아드네 데생을 이어갔다. 아그리파의 양감과 줄리앙의 역동성과 비너스의 부드러움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까다로운 석고상이다.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데도 땀이 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연필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렌의 빨간 구두를 신은 기분이었다.

“멋지다.”

데생을 본 정오는 끝내준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전에 본 적 없는 반응이라 이전에 그린 것과 그렇게나 차이가 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했다. 선생님도 전에 없던 호의적인 태도로 소영을 대했다. 이제야 좀 그림이 재미있어졌나 보네.

정오가 아리아드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소영은 단숨에 미궁을 통과해 카라칼라의 찡그린 미간에 도착했다. 정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림에 매달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학과 성적도 그만큼 더 벌어졌다. 그만큼 그림에도 더 힘이 붙었다.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정오보다 한 발짝 앞서 인물 데생으로 넘어갔다.

다 연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흔한 연필에 불과했으나 소영에게는 마법의 연필이나 다름없었다. 더 신기한 것은, 날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깔끔하게 깎여 이젤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몰래 응원이라도 한다는 듯이. 그래서 교복 주머니 속에 슬쩍 숨겨도 보았는데 다음날 보니 새 연필이 똑같은 모습으로 이젤에 놓인 것이다. 깎는 방식도 똑같았다. 같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 누군가는 연필을 놓고 가면 깎아 놓고 가져가면 새로 깎은 연필을 똑같이 갖다 놓았다. 그래서 다 알고 있다고, 보란 듯이 필통을 갖다 놓았는데도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젤 앞에 앉은 친구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정오가 아닐까 기대했다. 정오와 거리감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법의 연필을 손에 넣은 소영은 날개를 단 이카로스처럼 날아올랐고 정오에 대한 관심도 작아지는 지상의 풍경처럼 멀어져 갔다.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선생님에게 선생님 연필이냐고 대놓고 묻기도 했다. 표정을 보니 선생님도 아니었다. 돌아본 친구들도 이내 자신이 몰두한 세계로 돌아갔다. 설마. 남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하나같이 유치하기 짝이 없어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저 녀석이라면 하는 정도의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으나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나마 관심이 있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주말에 선생님 대신 그림을 봐주던 조소과 대학생이다. 화실 선배이자 선생님의 후배였는데 오뚝한 코에,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이른바 조각 미남이었다. 줄리앙이 따로 없었다. 석고상처럼 하얀 피부와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뻗은 팔뚝과 도드라진 파란 정맥마저도 예술이었다.

“훌륭해. 웬만한 학부생들보다 낫다.”

그는 물레에 올린 진흙처럼 부드럽고 묵직한 목소리로 소영을 격려했다. 소영의 그림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질그릇 같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관심사가 그에게로 옮겨가자 연필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연필은 반복해 온 규칙을 충실히 따랐다. 예외는 없었다. 언제인가부터 소영은 자신의 그림에서 보이는 재능이 연필 덕분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 연필이 그렇다는 말이지.”

그는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기대서서 진지하게 소영의 말을 들었다.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마법의 연필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화실 안엔 둘 뿐이었고 화실 열쇠는 그가 갖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뗀 그가 소영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러고는 감정사처럼 연필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느닷없이 입을 맞추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없었다. 소영이 상상한 키스는 이렇듯 공격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막상 일이 벌어지자 기대가 아닌 두려움이 소영을 집어삼켰다. 석고상처럼 몸이 굳었다. 그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를 밀쳐내었다. 그 역시 연필의 주인은 아니었다.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소영은 도망치듯 화실을 뛰쳐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낯익은 승용차가 보였고, 차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들려오는 “배고프지?” 소리에 눈물이 솟구쳤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며 교차 지원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더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빠는 말했다. 그깟 화가 안 되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배고픈 직업 아니냐. 홍대 앞에 미술 학원 하나 차려줄 테니 국립대만 가다오. 그날 엄마가 했던 말들도 아빠가 하는 말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화실을 찾은 것은 실기 시험 바로 전 날이었다. 놓고 온 그림이나 다른 물건들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 연필만큼은 도리가 없었다. 다른 연필로는 도무지 뜻대로 그려지질 않는 것이다. 노력만으로는 극복이 안 되었다. 행운이 필요했다.

“오랜만이네.”

발끝을 내려다보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내려오던 누군가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오였다. 정오도 예술대학교를 지원했을 테니 실기 시험 날짜도 같을 터였다.

“어쩐 일?”

소영은 아닌 척 정오의 표정을 살폈다.

“가져갈 게 있어서. 넌?”

정오는 숨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또 할 말이 있다는 듯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상했다. 그날 그와 있는 걸 본 건 아닐까. 그래도 정오라면 괜찮지 않을까. 날 걱정해주지 않을까. 저 손을 잡으면,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그러나 소영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포기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몸을 틀어 정오를 지나쳐갔다. 그러자 정오가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험 잘 봐.”

걸음을 멈춘 소영은 이번에는 반대로 계단 위에서 정오를 내려다봤다. 눈시울이 붉었다. 왜지?

“너도.”

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묻지 못했고 정오는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이 소영과 정오의 마지막이었다.




정오가 줄리앙 사건의 목격자라고 확신한 것은 화실로 올라갔을 때 발견한 부러진 연필들 때문이다. 전후 맥락상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돌이켜보니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문 밖에서 모두 엿들었는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오도 그를 좋아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똑같이 실망했는지도 몰랐다. 그날 소영은 부러진 연필들을 주워 들며 미처 깨닫지 못한 일들에 관해 생각했다.

결국 국립대 입시는 실패한다. 재수는 원치 않았기에 2지망으로 합격한 사립대 회화과에 등록했다. 그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은 채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 사이에서 돋보일 재주도 없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 대단하게 생각하는 작품 또한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림에 흥미를 잃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림을 그려왔음에도 그림이 재미있던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림은 고통이었다. 좋으면 좋아서 고통스럽고 나쁘면 나빠서 고통스러웠다. 전과를 할까 편입을 할까 고민하다 수능을 다시 보았고 여대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임용고시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교과 시험은 자신 있었다. 부모님도 만족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교사가 되고 나서야 안 것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을 역시나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르쳐야 했다. 교단에 서면 숨이 먼저 막혔다. 저 아이들의 미래를 내가 책임질 수 있나? 무슨 자격으로? 한 번도 누군가를 온전히 책임져 본 적이 없었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었다. 부모님도 아직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

마땅히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지도 않았다. 국영수 점수로만 가치가 매겨지고 권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만점 짜리니까 모든 권한을 줄게. 너는 빵점 짜리니까 모든 권한을 박탈하겠어. 신경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고 항우울제를 복용하자 모든 면에서 조금은 긍정적이 되었으나 교탁 앞에서의 두려움만큼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기사 속의 정오는 여전히 천재 예술가처럼 보였다. 소영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예술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NOON이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몸 안 어딘가에서 연필 같은 것이 뚝 부러졌다. 간신히 지탱해 온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더니 동강 난 연필들처럼 나뒹굴었다. 폐허가 됐다.